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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웃기지 않니? 패션 따위에 신경 쓰기엔 너무 진지하다고 주장하는 네가 사실은 패션계 사람들이 고른 색깔의 스웨터를 입고 있다는 게?"
-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미란다가 앤드리아에게-

이 영화, 한달반쯤 전 독일가는 비행기 안에서 봤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제 바쁜 일 손 털고 '난 왜 이렇게 같은 일을 계속해도 여전히 허둥댈까...'그런 생각으로 시무룩해 있던 중, 이 '프라다를 입은 악마'가 생각났다.

뭐, 내게도 악마같은 상사가 있었던 건 아니다. 차라리, 악마 같아도 좋으니 모든 판단을 믿고 위임할 수 있는, 판단이 100% 정확해서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상사가 있었으면....하고 바랄 때가 있다. 물론 비현실적 기대라는 것을 알지만....나 때문에 속터질 내 후배들은 날 보면서 똑같은 생각을 할 거라는 것도 알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 영화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싱싱하고 예쁜 여주인공 앤드리아도, 그가 세련된 뉴요커로 거듭나도록 해준 명품들도, 아니면 '프라다를 입은 악마'인 미란다 (메릴 스트립)의 코믹한 히스테리도 아니었다.

바로 저 장면, 미란다와 부하 직원들이 잡지 표지에 쓸 옷에 딱 맞는 파란색 벨트를 고른다고 고심하고 있는데 옆에서 앤드리아가 '다 비슷비슷해보이는 물건 가지구 유난을 떨기는~'같은 투로 피식 웃자 성격 까칠한 미란다가 앤드리아를 조곤조곤 작살내는 장면이다.

미란다가 앤드리아를 어떻게 '아작'을 내는지 조금 더 들어보자.

“이런...물건? 아, 알았다. 넌 이게 너랑 아무 상관없는 거라 생각하는구나. 넌 네 옷장으로 가서 그 볼품없는 파란색 스웨터를 골랐겠지? 그러면서 넌 네가 패션 따위에 신경을 쓰기엔 너무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겠지? 하지만 넌 그 스웨터가 단순한 파란색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구나. 그건 정확하게 말하면 ‘셀룰리언 블루’야. 2002년에 오스카 드 렌타가 셀룰리언 블루색 가운을 발표했지. 그 후에, 입생 로랑이 군용 셀룰리안 블루 재킷을 선보였고, 그 뒤 8명의 디자이너들의 발표회에서 셀룰리언 블루가 계속 쓰였지. 그런 뒤엔 백화점으로, 끔찍한 캐주얼 코너로 넘어간 거지. 그렇지만 그 색은 수많은 재화와 일자릴 창출했어. 좀 웃기지 않니? 패션계와 상관없다는 네가 사실은 패션계 사람들이 고른 색깔의 스웨터를 입고 있다는 게? 그것도 이런 ‘물건’들 사이에서 고른!”                                                                         

앤드리아를 꼼짝 못하게 조져대면서 미란다는 흥분하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으며, 손으로는 계속 분주히 잡지 표지에 쓰일 드레스에 걸맞는 벨트를 고르고 재킷을 찾아 멋진 코디네이션을 완성한다. 상대를 꼼짝 못하게 제압하면서도 여전히 나른하고 싸늘한 그 말투라니...압권이다.

이 장면이후로 나는 미란다가 앤드리아에게 폭풍우 몰아치는 날 비행기 표를 당장 구해오라는 둥의 에피소드처럼, 미란다의 '악마성'을 강조하기 위해 영화에 쓰인 뻔한 클리셰들을 다 용서하기로 했다.

난 전문가가 좋다. 어떤 분야에서든 경지에 오른 전문가를 경배한다.
미란다처럼 자신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일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경멸에도 꿈쩍하지 않으며 되레 자신이 몰입하고 있는 이 하찮고 사소한 일이 어떻게 다른 분야,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에 스며들고 관계맺고 있는지를 쫙 꿰뚫고 있는 전문가, 나무 한그루 심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면서도 숲을 볼줄 아는 전문가가 좋다.

하지만 요즘 들어 자주, 그런 전문성이라는 것이 적당한 정도의 노력을 얹어 시간이 흐르기만 하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란 걸 절감한다....같은 일을 꽤 오래해왔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내가 속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없으니 동료 관계가 주는 위로 같은 것도 전혀 도움이 안된다.
...문제는 비전이다. 목표의식이다.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어야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언제 어디에 투입해야 하는 지를 알게 되고 경험에 질서가 생긴다. 그래야 평가와 계획, 그 모든 과정을 통한 축적이 가능해진다. 요컨대 뭔가를 잘 하고 싶다면,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피터 드러커 아저씨같은 사람은 우리가 하는 일이라는 건 대개 반복적이므로 일하는 재미란 일 자체에서 찾을 수가 없다고 단언한다. 대신 일의 결과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몸은 현재의 일에 묶여 있을 지라도 시각은 항상 높은 곳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높은 곳'이 곧 자신이 원하는 것, 이리라. 또 문제는 그 지점으로 돌아온다. 십수년째 스스로에게 던져왔지만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질문.....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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