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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구경

지리산의 들꽃

sanna 2009. 9. 9. 23:32

지리산을 종주하다. 종주기를 쓰고 싶지만 도무지 짬이 안 나고, 그렇다고 그냥 말기는 뭐해서 간단한 메모만. 위 사진은 천왕봉에 오르기 전 마지막 쉼터인 장터목 대피소 가는 길목. 첩첩산중에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 1박 2.5일이라고 해야 할지. 금요일 밤 10시20분에 서울에서 남원행 버스를 타고 출발. 새벽 3시20분 성삼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그 캄캄한 시간에 산행을 시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그렇게 토요일 15시간을 걸었고, 세석산장에서 잔 뒤 일요일 7시간을 걸어 중산리로 내려오다. 코스는 성삼재-노고단-노루목-화개재-연하천-벽소령-세석대피소-장터목-천왕봉-법계사-중산리.


- 등산을 좋아하긴 해도 잘하진 못하는 내가 계속 뒤처지자 등반대장을 맡은 선배가 계속 “얼마 안남았어” “이제 다 왔다” “10분만 가면 돼”하고 계속 격려를 건넸다.
그러자 다른 선배가 옆에서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게 더 나아”하고 초를 치더니 낙관적 선배가 하는 말에 곱하기 2를 해서 생각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조언한다. 낙관적 선배가 앞길이 ‘평지’라고 알려주면 ‘아, 오르막길이구나’ 생각하고, 남은 시간 ‘10분’이라고 말하면 ‘30분 이상’이라고 고쳐 생각하라는 것이다.
낙관과 비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나는 ‘낙관적 비관’으로 마인드 콘트롤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전진하는 것 밖에 산에서 내려갈 다른 방법이 없고, 이미 꽤 많이 왔고 곧 내려가게 될 것이라는 걸 알지만, 매번 목표지점이 낙관적 선배 말대로 “10분만 가면” “저 모퉁이만 돌아가면” 나올 거라는 기대는 버리기.


- 천왕봉 꼭대기에선 내가 지나온 노고단의 산봉우리가 아련하게 보인다. 불과 하루 전 구름 위로 솟은 저 먼 곳을 내가 걸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등반대장이 “지리산을 종주하고 나면 앞으로 어떤 산도 두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산리에 내려가서 마침내 큰 산 하나를 넘어왔다는 걸 실감했을 때 그 선배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앞으로 어떤 산도 두렵지 않을 거야.....

- 지리산에 가기 전에, 오래 준비해온 책 출간 건 하나가 취소돼버렸다. 그 책을 위해 해외출장을 가려고 했고 상대방에게도 취재 간다고 다 말을 해두었는데, 출판사와 협의가 엉클어져 결국 불발로 끝났다. 관련 책을 번역하는 것으로 대체. 씁쓸하고 우울했는데 지리산 등반 이후 ‘까짓것 뭐’ 하는 느낌이다.
9월부터 늦깎이 대학원생이 되어 공부도 해야 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번역도 해야 하고, 내 책을 쓸 준비도 해야 한다. 할 일이 널렸고 코앞으로 다가온 마감만 해도 몇 개인데, 일은 안하고 계속 ‘까짓것 뭐’ 모드다. 지리산 다녀와서 실속 없이 배포만 커진 느낌. -.-;

(쓰다 보니 이게 무슨 간단 메모야. 이럴 바에 차라리 종주기를 쓸 걸~)

  천왕봉에서 바라본 반야봉 (오른쪽)과 노고단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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