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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다녀온 방글라데시 출장에 대한 뒤늦은 기록.
최빈국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에서 세이브더칠드런이 운영하는 여러 프로그램들 중 '마모니 프로젝트'라는 걸 보러 다녀왔다. '마모니'는 방글라데시 말로 '엄마와 아이'라는 뜻인데, 산모들의 안전한 출산과 5세 미만 영유아의 사망률을 낮추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병원이나 보건소가 없고 그런 시설을 지어본들 거기서 근무할 의사나 간호사가 없는 오지 마을에서 세이브더칠드런은 마을 주민들 중 고졸 이상의 학력을 지닌 사람을 선발해 보건 요원 (health worker) 으로 훈련시켜 마을의 신생아들과 산모들의 건강을 체크한다. 내가 간 곳은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을 간 뒤 다시 차를 타고 엉망진창인 길을 2시간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이지만 이런 health worker system이 비교적 잘 운영되는 마을이었다.

위의 사진(왼쪽)은 보건 요원인 쇼토부티가 아이를 낳은지 얼마 안 된 집에 찾아가 응급상황 대처요령을 설명하는 장면이고, 오른쪽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여성들이 쇼토부티가 가져온 그림으로 아이를 낳을 때 발생 가능한 응급상황, 그리고 피임 방법 등을 배우는 장면이다. (©김수진/세이브더칠드런)

이번 출장엔 특별한 손님이 동행했는데 소설가 김연수씨였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고 섬세한 그의 글을 평소에 좋아했던 터라, 연예인 말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과 동행하면 어떨까 생각하는 순간 그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김연수씨가 방글라데시에 다녀와서 쓴 글은 중앙일보에 한 면 전면기획으로 실렸다. (기사 바로가기)

 

국제개발NGO에서 일하면서도 실제로 현장에 가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주변의 친구, 선배들 중에 가끔 내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은퇴하면 나도 그런 단체에서 봉사하면서 일하고 싶다고. 처음엔 고개를 끄덕였다인생 2막을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지. 이 일을 시작할 때 내 마음도 딱 그런 정도였다.

하지만 방글라데시에 다녀온 뒤 이 일이 봉사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받는 사람 입장에선 난데없이 남이 내 삶에 갑자기 뛰어드는, 내게 낯선 방식의 삶으로 바꾸기를 권유하는, 때로는 폭력적으로 개입한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게 국제개발, 흔히들 말하는 원조다. 최악의 원조는 실제로 받는 사람에게 얼마나 지원이 가고, 그 지원이 받는 사람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에 얼마나 기여하느냐 하는 고려보다, 주는 사람이 주연이 되는 방식의 원조다
우리가 갔던 방글라데시 현장이 워낙 잘 운영되는 곳이라 그런 생각이 더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이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려면 이건 봉사자가 아니라 전문가, 도움을 받는 사람이 처한 환경과 삶의 맥락에 대한 깊은 이해와 돕는 방식에 대한 전문적 식견. 이 두 가지를 갖춘 전문가의 일이라는 생각. 
다카의 세이브더칠드런 사무실에서 우리에게 열정적으로 '마모니 프로젝트'를 설명하던 임티에즈를 보고 김연수 씨는 "교전 중의 장교 같다"고 했다. 복잡한 숫자와 그래프들,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어떤 시점에 개입해야 하는지, 가장이 모든 권한을 갖고 있는 이슬람 마을에서 집집마다 여성과 아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어떤 전략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그를 보면서, 프로젝트 하나를 시작하기 위해 저렇게 많은 고려가 필요하다니 새삼 놀라고 감탄했다. 


가기 전에 숱하게 들은 주의사항과 달리, 음식 때문에 힘든 적 없었고위생환경 때문에 괴로운 일도 없었다. 환경의 변화나 위생에 내가 워낙 둔감한 탓이기도 하지만, 그걸 뛰어넘어 되레 식도락 여행이라 할 정도로 음식이 입에 잘 맞아 즐거웠던 여행. 또한 생각이 깊은 동행자 덕택에 내가 하는 일을 여러 모로 되돌아보게 되었다. 돌아와서 공부해야 할 리스트를 쭉 뽑아보니 한숨부터 나오지만....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는 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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