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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청소 중 잡담

sanna 2012. 2. 20. 22:59

# 조만간 집 공사를 해야 해서 밤마다 짐 정리 중이다. 살고 있는 집에서 하는 공사라, 미리 짐 치워놓는 게 큰 일이다. 오늘 밤까지 6단 짜리 책장 4개를 죄다 비우는 일을 마쳤고, 책장 위에 올려놓고 잊고 있던 온갖 파일노트들을 끌어내려 전부 버렸다. 

 

# 오늘 버린 파일 노트는 모두 40. 93년부터 2001년 미국 연수를 가기 직전까지 내가 쓴 기사를 정리해뒀던 것이다. 93년 이전, 그리고 연수를 다녀온 뒤론 스크랩을 하지 않았다. 양면 40쪽 짜리 파일 노트니까 모두 1600 페이지. 9년간이라 치면 1년에 178, 평균 이틀에 한 건씩 기사를 쓴 셈. 93년 2월부터 2001년 6월까지이니 기간을 정교하게 계산하면 이틀에 한 건 이상일테고, 아무튼 기사 적게 쓰고 밥 축내며 놀진 않았구나, 싶다.

비닐 안에 넣는 방식의 파일 노트인 탓에 오려서 넣어둔 신문 쪼가리를 일일이 꺼내어 버리는 미련한 짓을 두 시간 넘게 했다. 재활용품으로 종이와 비닐을 분리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냥 버린 뒤 내 이름이 달린 기사들만 꽂혀 있는 파일 노트가 어딘가 굴러다닌다고 생각하면 좀 찜찜해서다.

 

# 9년의 기록을 보니, 참 별 기사를 다 썼다커피 머신 관리요령, 송년 파티 화장법, 남성학부터 시작해 성폭행을 일삼던 아버지를 남자친구와 함께 살해한 김보은, 김진관 사건, 지존파 사건,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 사건 기사가 유난히 많다. 시청 출입할 땐 지방자치제 도입 이후 민선 1기였던 조순 시장을 졸졸 따라다니며 지금 읽으면 참 가당치도 않은 기사들을 써댔다. 영화 담당을 할 때는 기사에 무슨 애착이 그리도 많았던지 비디오 소개하는 단신을 쓴 것까지 전부 오려 스크랩을 해뒀다. 데스크가 교열 대장에 수정해놓은 대목을 복사해서 내가 원래 쓴 것과 같이 끼워놓은 스크랩도 있다. 데스크의 수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오기 같은 거였을까. 지금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유명짜한 인사들을 인터뷰한 기사들도 꽤 된다. 지금같았으면 절대 그 신문 인터뷰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을 사람들도 그때는 자주 만났다. 좌/우로 갈라진 물어뜯기와 혈투가 그때는 거의 없었다. 지금의 상황과 비교하니 괜히 씁쓸한 기분... 

 

# 예전엔 스트레이트 기사에는 기자의 이름이 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버려버리면 누가 썼는지 영영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게 서너권쯤 되는데, 그런 기사들을 끄집어 내 쓰레기통에 쑤셔 넣을 땐 좀 망설였다. 이것도 내 개인의 역사인데 좀 더 갖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맥락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과 말들을 내 역사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기억한다고 해도 그런 것들을 끌어안고 사는 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5년 전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올 땐, 91년 기자가 된 뒤 모아두었던 취재수첩을 다 버렸다. 한 때는 책 수집 욕도 강했으나 그 역시 버린지 오래다. 뭐든 덜어내면서 살기로 결심한지 몇 해 째다......심호흡을 하고, 내 이름이 달리지 않은, 내가 쓴 기사들을 전부 버렸다. 이제 그 말들은 주인 없는 말들이 되어 신문사 자료실, 아니 네이버의 옛날신문DB 안에서 잠들겠지. 이후에 혹시 마주친다 해도 나조차 내가 쓴 말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 파일노트 40권을 탈탈 털어 기사들을 버리면서, 갖고 있으려고 남겨둔 글은 딱 하나다. 하필 신문에 쓴 기사가 아니라 99년 비디오 잡지인 '영화마을'의 '매니아 추천 비디오' 코너에 쓴 글. "글로리아 두케"라는 제목의 영화를 소개한 글인데, 그 때 그 영화를 무지 좋아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본 기억이 생생하다. 글은 심드렁하게 썼지만, 안팎으로 위기였던 탓에 몹시 힘이 들었던 시절.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부정할 마음 역시 조금도 없는 시간과 기억들. 돌이켜보면 들뜨고 빛났던 때보다 어둡고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던 시절의 경험이 지금의 내가 되는 데 더 큰 영향을 끼친 것같다.     
 

# 중앙일간지의 한 논설위원이 칼럼의 모든 문장 앞에 꼭 # 표시를 다는 게 몹시 거슬려서 그 위원의 글은 아예 읽지도 않았다. 근데 지금 낙서를 끼적거리다 보니 이유를 알겠다. # 표시를 앞에 달고 쓰면 메모를 하는 듯한 기분이라, 두서 없는 글을 써도 뭐 어떠랴 하는 심정이 된다. ㅎㅎ 그 논설위원도 그런 마음으로 칼럼의 모든 문장에 # 표시를 달까? 갑자기 궁금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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