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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 메리 올리버 '기러기'

 

요즘 자기 전에 매일 읽는 시.

야근하고 밤 늦게 기어 들어와 뻑뻑하게 흐려진 눈으로 다시 읽는다.

뭐라 콕 짚어 말할 수 없지만 매번 울컥하게 느껴지는 묘한 위로... 시 때문인지 내 마음 때문인지.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엔 원제인 '기러기'는 잊어버리고 소설가 김연수가 소설 제목으로 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은 시.

 

내가 아닌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 없고, 절망이 절망을 만나 사랑이 되는 순간을 향한 그리움을 구태여 감출 필요 없고, 그 마음이 누추하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고, 언제든 달아나기 좋게 가장자리로 슬쩍 물러나려고 눈치보며 우물쭈물할 필요도 없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 가운데.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내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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