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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이 게임, 인터넷에 빠져 놀 줄 모른다고들 개탄하지만 그건 어른들의 오해다. 내가 일하는 단체가 최근 서울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와 함께 진행한 ‘아동 삶의 질 조사’에서 두드러진 결과 중 하나는 아이들에게 골목길, 놀이터처럼 또래와 노는 공간이 매우 중요하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마을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주변에 놀 곳이 없다, 으슥한 골목길, 안전하지 않은 놀이터’를 꼽았다. 반면 마을에 대한 긍정적 인식에서 가장 자주 거론된 요인도 놀이터였다. 연구진의 예상 이상으로 아이들은 놀이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놀이터는 공터 이상의 의미, 동네를 안전하게 느끼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점점 더 아이들이 놀 곳이 사라져간다. 놀이터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지고, 돈을 내고 놀이를 사야 하는 키즈카페가 성업 중이다. 살인적 학습량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심지어 학교 운동장에서 놀기도 어렵다. 이번 조사 이전에 내가 일하는 단체에서 만났던 아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드문드문 놀아야 해요. 밖에서 크게 놀진 못해요. 점심시간에도 위험하다고 운동장에 못 나가게 해요.”

 

이 와중에, 있던 놀이터도 없어지는 추세다. 현재 정부는 전국의 놀이터 설치검사를 진행 중인데 합격하지 못하면 시설 개선 후 재사용을 신청해야 하며 내년 1월까지 검사를 받지 않은 놀이터는 폐쇄된다. 아파트 단지에서 불합격으로 폐쇄된 놀이터들이 곧잘 눈에 띄지만 시설 개선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주민들이 장기수선충당금을 써서 기꺼이 고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개선비용에 수천만 원이 드는 반면 불합격 놀이터를 그냥 이용하게 해도 벌금이 1천만 원이므로 구태여 고칠 이유가 별로 없는 상황도 한몫했을 것이다. 정부에 물어봐도 지방자치단체들은 가뜩이나 재정난에 시달리는 마당에 놀이터 시설 개선 지원은 엄두도 낼 수 없다고 말한다. 중앙정부는 지방사무라고 외면한다.

 

정부가 아이들 놀이까지 신경 써야 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정부가 아이들의 놀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한 유엔아동권리협약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더 비근한 예가 있다. 영국은 2008년 놀이 정책을 국가 전략으로 채택하고 경제적 여건, 장애 등 어떠한 이유로도 놀이 기회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균등한 놀이기회’ 보장을 선언했다. 각 지역에 놀이터 조성위원회, 건축위원회를 설치하여 안전하고 접근이 쉬운 놀이터를 새로 짓고, 학교와 어린이집의 놀이시설을 개선하며 이 모든 과정에 지역주민과 아이들이 참여하여 의견을 내도록 했다.

 

영국이 이런 정책을 편 데에는 여덟 살 소녀 빅토리아 클림비가 학대로 숨진 사건 이후 아이들조차 제대로 보호하고 배려하지 못하는 나라라는 자각과 반성이 계기가 됐다. 우리는 어떤가. 잇따른 아동학대사망사건들과 세월호의 비극 이후 아이들의 삶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과연 이대로 좋은지에 대해 우리는 어떤 반성과 자각을 하고 있나.

 

경쟁과 수익창출이 지상과제일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장소는 공적인 삶이 이뤄지는 곳이기 십상인데 그 대가는 크다. 동네의 놀이터와 골목길은 아이들이 공적인 삶을 배우는 공간이다.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 없이 놀면서 아이들은 낯섦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차이를 협상하고 갈등의 타협점을 모색한다. 그렇게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키운다. 그런 물리적 공간이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놀이터를 허(許)하라.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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