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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기고문

갑과 을

sanna 2013. 3. 17. 19:22

나는 신문기자를 하다가 4년 전에 그만두고 지금은 국제구호개발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일한다. 그런 이력을 아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자주 듣는 촌평은 “슈퍼 갑에서 을로 옮겼네?”이다.

 

내 딴엔 고심해서 내린 결정을 ‘갑을의 지위 전환’으로 명쾌하게 정리하는 촌평을 하도 자주 듣다보니 미욱한 내 눈에도 갑을관계의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즘은 TV 개그 프로그램에 ‘갑을컴퍼니’라는 풍자코너도 생겼고, 대기업과 하청업체의 관계에서부터 대북관계, 심지어 친구나 연인, 부부사이도 갑과 을로 설명하면 누구나 단박에 알아듣는다. 이제 어느 누구도 갑과 을을 단순히 계약서상의 쌍방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회적 지위와 권력의 우열이 있는 모든 관계는 죄다 갑을관계이며 사람들은 그 관계 속 자신의 위치에 더욱 민감해졌다.

 

모든 사회적 관계를 갑과 을의 틀로 바라보는 경향이 더 심해지는 건 그만큼 갑의 위세가 더욱 강해지고 을의 처지가 고단하기 때문일 터이다. 사회가 공동체와 갈수록 멀어지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다 권력과 지위의 서열이 더 뚜렷해졌다. 갑을관계가 인격의 상하관계처럼 간주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사회는 그야말로 강자들의 리그가 되어간다.

 

일그러진 갑을관계를 바로잡는 방법은 갑이 베푸는 시혜도 아니고, 권력 구조를 도외시한 채 을에게 ‘억울하면 갑이 되라’고 개인적 노력을 주문하는 것도 아니다. 갑과 을이 동등한 파트너가 되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요원하다면, 최소한 갑이 사회가 정한 게임의 규칙이라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갑은 어떠한가? 최근 고위공직 후보자들이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고 줄줄이 낙마했을 때 유난히 눈에 띈 건 그들의 억울하다는 항변이었다. 힘없는 을들은 다 지키는 규칙을 지키지 않고 살아온 게 들통 났는데도, 민망해하거나 자중하기는커녕 청문회를 탓하고 가정이 파탄 날 지경이었다며 울분을 토했다

사회적 규칙에 대한 이같은 자의식의 결여가 내 눈엔 참 특이해보였다. 그토록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왜 유난히 규칙을 피해가는 편법 지름길과 특별대우를 찾고, 심지어 그걸 스스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걸까? 아마 진심으로 자신이 그런 특별한 대우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갑들의 함정인 것 같다. 사회적 지위와 자신을 끊임없이 분리해 생각하려 안간힘을 쓰는 을들과 달리, 많은 갑들은 지위와 스스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동일시한다. 기자 시절에 만난 성공한 사람들 중 퇴임 후에도, 심지어 부부 사이에서도 회장님, 장관님, 교수님 등의 호칭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곧잘 보았다. 호칭이 애매한 한국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고 진심으로 존경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얼굴을 곧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심리적 착시는 개인의 삶에서나 주변 사람들에게 힘겨운 문제를 많이 만들어낸다. 자신이 규칙을 넘어서는 어떤 편의나 특별대우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착시는 그 중 최악일 것이다.

 

자기 자신과 사회적 얼굴을 구분하는 일은 사람이 평생에 걸쳐 풀어야 할 숙제라고 한다. 삶의 방향을 틀 무렵 내가 스스로에게 가장 자주 던진 질문은 어느 학교 출신, 어느 직장의 누구, 무슨 역할, 지위 등등 모든 ‘계급장’을 다 떼어낸 뒤에 나는 누구인가였다. 대답하기 쉽지 않다. 동문들도 한번쯤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를 권한다.

 

-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뉴스레터 봄호, 동문기고 코너에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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