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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를 방불케 하는 ‘도가니’ 상영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정부 여당의 대책이 쏟아진다. 가해자 처벌 강화, 법인 취소 방침 등의 대책 발표가 잇따르고, 4년 전 “사회주의적”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던 사회복지법인에 대한 공익이사제 도입도 실현될 태세다.

잇따른 대책들을 지켜보다 의문이 생겼다. 가령 지금 거론되는 대책들이 이미 다 있다고 가정한다면 ‘도가니’의 재발을 막을 수 있을까? ‘그렇다’라는 대답이 선뜻 나오질 않는다.


‘도가니’의 아이들은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아동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장애아동은 폭력의 피해자가 될 확률이 일반 아동보다 4~5배 높다. 게다가 시설에 거주하는 아이들이 성적 학대를 당할 확률은 일반 아동보다 4배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두 경우가 결합되었으니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아동’은 폭력에 가장 취약한 약자일 수밖에 없다.


흔히들 장애아동이 폭력에 취약한 이유는 장애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보다는 장애아동이 투명인간처럼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장애아동’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지만, 장애아동은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결여된 것에 의해 정의된다. 장애를 결손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비롯하여 적대시하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사회적 차별, 반대로 장애아동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다급한 마음, 빈곤 등 이유들은 서로 다르고 복잡해도 그로 인해 빚어지는 대체적인 결과는 장애아동을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격리시킨다는 것이다. 집안에만 머물게 하거나, 우리나라처럼 대규모 시설이 여전히 존재하는 나라에선 시설이 그러한 격리의 장소가 되기 쉽다.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범죄도 보이지 않는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장애아동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대개 아이들이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성인들이다. 세이브더칠드런과 핸디캡 인터내셔널이 최근 함께 펴낸 ‘장애아 대상 성폭력 보고서’에 따르면 성폭력을 경험한 장애 아동의 3분의 1 이상이 평소에 잘 알고 그들에게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성폭력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도가니’도 바로 그런 경우다.

사회적 배제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도 받기 어렵고 어느 누구도 권리에 대해 말해주지 않으니, 장애 아동 중에선 가해자들이 지시하는 대로 성폭력이 정상적인 일이라고 알고 있거나 대처할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장애와 성폭력이라는 이중의 낙인을 감수하고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해도 사법기관은 장애아동의 말을 잘 믿지 않는다. 이 절망의 연쇄를 낳는 뿌리는 장애 그 자체가 아니라 장애아동에 대한 극심한 사회적 배제와 격리다.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보이게 하는 것, ‘도가니’의 해결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도가니’에서도 외부와의 통로가 되어준 교사와 시민단체 간사가 없었다면 문제점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장애 아동과 세상과의 연결 통로가 있어야 하고, 아이들이 두려움에 떨지 않고 의견을 말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대규모 수용 시설 대신 지역사회에 열려 있고 최소한의 가족적인 환경을 보장하는 작은 규모의 그룹 홈이나 전문 위탁가정의 보호를 받도록 하는 조치 등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세이브더칠드런과 핸디캡 인터내셔널은 장애 아동, 시설 거주 아동에 대한 별도의 국가 통계 작성과 더 많은 연구조사를 제안했다. 국내에서도 아동복지법 시행규칙 등에 이를 명문화하여 실행해야 한다.

또 하나. ‘도가니’ 대책의 모든 초점이 폭력의 제재 방법에 맞춰져 있을 뿐 피해자인 아이들에 대한 의료적, 심리적, 교육적 서비스가 간과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영화 ‘도가니’ 상영 이후 온갖 대책들이 요란하게 나오지만 정작 고통 받은 아이들을 위한 치유책을 마련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도가니’는 구체적인 사람이 짓밟히고 상처받은 사건이다. 추상적 차원의 대책만으로는 치유되지 않는다.

- 어제자 내일신문에 실린 글 입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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