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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보다 더 큰 어른이 되면 아빠를 패주고 싶어요.


이 한 마디를 읽는 순간, 움찔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이를 만난 상담원의 이야기를 자세히 청해 들었다.


열 살 민수(가명)의 머리엔 500원짜리 동전만한 크기의 원형탈모가 있다. 한 달 전쯤 아버지에게 막대기로 심하게 맞은 뒤 생겼다고 한다. 민수가 아버지에게 맞기 시작한 건 네 살 때부터다. 멀쩡한 직장인인 아버지는 거의 매일 술에 취한 채 귀가해 아들과 아내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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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넘도록 두들겨 맞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아이의 마음이 온전할 리 있을까. 민수는 학교에서도 수업 도중 갑자기 나가버리는 건 예사고 눈에 살기가 가득한데다 입이 험해 친구가 없다. 유일한 낙은 좀비를 죽이는 온라인 게임이다. 민수는 절대 이 게임을 끊을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를 좀비라고 생각하고 게임을 하면 그나마 속이 좀 후련해지기 때문이란다.


담임선생님이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하자 민수는 그러면 자기가 맞아죽는다고 펄쩍 뛰었다. 보다 못한 이웃이 신고해 아동보호전문기관이 나섰지만, 어렵게 연락이 닿은 민수 엄마는 내리 울면서도 남편의 보복이 두렵다며 끝내 상담을 거부했다.


민수네 이야기가 ‘이상한 가족’의 예외적 사례로 들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 해 전국 아동보호전문기관이 다룬 아동학대사례 5657건 중 83%의 가해자가 부모다. 88%는 집안에서 일어난다. 10년째 지겹도록 변하지 않는 수치다.


마음이 답답해져 민수의 이야기를 주변에 들려주자 다들 안타까워하다 못해 화를 냈다. “아니, 그걸 보고만 있으면 어떻게 해!


누군들 보고만 있고 싶겠는가. 경찰에 신고하면 될까? 아동복지법엔 수사기관이 학대 현장조사에 동행할 의무가 없으므로 강력범죄 수준이 아니면 경찰은 꿈쩍 안 한다. 그럼 아버지의 부모 자격을 박탈하는 건 가능할까? 민간인인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이 가해자가 휘두르는 흉기를 피해 간신히 아이를 데리고 나온들 부모가 찾아와 ‘내 자식 내놔라’ 우기면 도리 없다. 한국 사회에서 친권은 너무나 강력하다. 현행법상 친권 제한 청구권을 가진 지방자치단체장이 그냥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학대받는 아이의 대다수는 다시 부모에게 돌아가고, 학대는 계속된다. 혹시 민수 아버지를 ‘새사람’으로 만들 순 없을까? 가해 부모에게 상담과 교육을 받게 하는 강제조항이 없으므로 본인이 싫다고 하면 방법이 없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이런 악순환을 그만 끊자고, 사법당국이 엄중하게 대처하고 친권 제한이 실제로 가능하게 하며 아동학대 신고율을 높이자고 아동학대 방지법 제정안, 아동복지법 개정안 등이 이미 발의되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은 법안 처리에 별 관심이 없다. 18대 국회에서 노인관련 법안은 가결, 대안폐기, 철회를 포함해 26건 처리된 반면 아동관련 법안은 겨우 1건 처리됐고 이마저 발의한 의원이 자진 철회한 경우였다고 한다. ‘표’와 상관없는 아이들 문제라 그런 모양인데 학대예방 대신 투표연령 낮추기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나……


남의 나라와 비교하기 싫지만 영국에선 일곱 살 소녀 빅토리아 클림비가 이모에게 폭행당해 숨졌을 때 의회조사단이 구성됐고 400페이지짜리 조사보고서가 나왔다. 아동법이 전면 개정됐고, 가해자는 종신형을 받았다. 10년 전 이야기다. 반면, 올해 초 서울에서 세 살배기 아이가 아버지에게 폭행당해 숨지고 쓰레기장에 버려졌을 때 국회에선 미동도 없었고 가해자는 최근 5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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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국회가 열린다. “아빠를 패주고 싶다”는 민수가 이대로 일그러진 채 자라서 어른이 된 사회를 한번쯤 생각해보길 의원들에게 권한다.
 
--- 오늘자 동아일보에 '아동학대, 국회는 언제까지 외면할 건가'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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