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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오피니언사이트 훅에 실린 글 입니다 (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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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부 서약(Giving Pledge)’운동을 시작한 미국 갑부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부부에 대한 칭찬이 국내에서도 자자했다. 미국의 억만장자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자고 권유하는 운동을 일으킨 ‘착한 부자’들에 대한 놀라움과 부러움이 앞섰고, 한국 부자들은 뭐하느냐는 질책이 뒤따랐다. 어느 신문 사설은 “미국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도록 도움으로써 자기가 사는 사회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지혜를 발휘해왔다”면서 ‘기부 서약’을 체제수호 운동으로 해석하는 기발한 창의력을 ‘발휘’했다.
 
착한 부자라는 칭찬이나 체제수호에 앞장서는 애국적 부자라는 칭찬이나 그 전제는 이들의 기부가 이기심을 초월하는 이타적 행위라는 것이다. 개인 재산을 아낌없이 투척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슬그머니 어깃장을 놓는 의문이 든다. 이들의 기부가 순전히 이타적 동기에 의한 것일까? 미국 부자들은 유난히 착하기 때문에 그런 운동을 하는 걸까?

더 많이 갖는 것이 부(富)라는 관념은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인류학자들의 현지조사 결과를 들여다보면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았다.
영국 인류학자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는 20세기 초반 뉴기니 동북부의 군도인 트로브리안드 섬에서 쿨라 링(Kula Ring)이라는 독특한 교환제도를 연구했는데, 이는 조개팔찌와 조개목걸이를 반대방향으로 끊임없이 순환시키며 교역을 하는 경제체제다. 쿨라 교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파트너에게 더 많은 선물을 주기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더 많이 주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니, 이들에겐 소유욕이 없는 걸까? 아니다. 이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소유욕이 강하며 부를 사회적 지위, 개인적 미덕으로 간주한다. 다만 부의 개념이 다를 뿐이다. 이들에게 부의 징표는 관대함이다. 경쟁과 갈등, 반목은 이들 사회에서도 여전하지만 이들은 누가 가장 관대한가를 놓고 경쟁을 벌인다. 받은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에게 더 많은 선물을 줌으로써 상대를 인색한 사람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과시하는 것이다.

더 많이 주는 것이 부와 세력의 과시 수단인 것은 북서부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미치광이 같은 증여의 잔치라 할 포틀래치(Potlatch)를 수시로 벌였는데 어떤 추장은 상대를 끽소리 못하게 압도하려고 가장 비싼 동판을 부숴버리거나 물속에 던져버리기도 한다. 추장은 재산을 소비하거나 나눠줌으로써 ‘명성의 그림자’로 다른 사람들을 뒤덮고 자존심을 꺾어버릴 때에만 자신의 부를 증명할 수 있다. 더 많이 주어야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며, 이득을 얻기 위해 주는 사람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콰키우틀 족은 포틀래치를 주지 않는 신화 상의 추장을 ‘썩은 얼굴’이라고 불렀다. 이들에게 위세를 잃어버리는 것은 얼굴이자 인격인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더 주려고 안달했다.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이와 같은 경쟁적 증여체계를 분석하면서 명예 관념이 이들 사회를 휩쓰는 가치임을 주목했다. “원시 부족에게서도 명예문제는 우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민감한 문제”이며 “인간은 서명하는 것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자신의 명예와 이름을 거는 일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모스의 분석이다.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관대함과 경쟁, 그리고 명예에 대한 추구. 게이츠와 버핏 부부의 기부 운동에도 비슷한 심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멜린다 게이츠는 ‘포츈’지와의 인터뷰에서 기부 운동을 독려하고 참여하는 억만장자들 사이에 “군중심리(crowd mentality)”가 있다고 말했다. 몇 사람이 시동을 걸어 기부가 명예로운 일이 되면 “남들을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될 것”이라는 거다. ‘네가 하면 나도 한다’는 또래 압박감(peer pressure), 관대함의 경쟁심리가 억만장자들의 기부 운동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경쟁적 기부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증명하고 명예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미국 억만장자들의 기부 운동은 인류학자들이 관찰한 원시 부족들의 증여의 동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거액의 기부로 얻을 수 있는 명예와 사회적 영향력이 어떨 지는 ‘철강왕’인 앤드류 카네기가 미국 역사상 가장 가혹했던 노조 탄압보다 기부 문화의 선구자로 오늘날 더 강렬하게 기억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한국 재벌들은 왜 그렇게 착하지 못하냐고 너무 탓할 일도 아니다. ‘주는 것이 부(富)’가 되려면 재벌의 인격수양보다 주는 일이 명예가 되고 축적보다 고귀한 가치로 간주되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 한국 재벌들이 기부에 거의 관심이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고 부자인 것 그 자체로 존경받는 사회, 편법으로 재산을 불리고 법 위에 군림하는 재벌이 툭하면 ‘존경할만한 부자’ 1위에 오르는 사회인데 재벌들이 뭐가 아쉬워 기부를 통해 명예를 추구하고 사회적 존재임을 증명하려 들겠는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저임금을 협상하면서 달랑 10원의 인상안을 내놓았던 '사장님들’을 보면 나눔과 기부는커녕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없어 보인다. ‘착한 부자’가 나오려면 아직도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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