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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때 아이였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나, 읽는 여러분이나 모두. 그래서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요. 어렸을 때 어떤 일을 겪었건 어린 시절은 곧잘 미화되기 마련이어서, 즐거울 때 우리는 곧잘 ‘동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곤 합니다. 슬프거나 힘땐 쓰지 않는 말이 동심, 즉 아이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요? TV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해서 인기가 높은 아이들의 깜찍하고 귀여운 말들이 요즘 아이들의 마음을 대표하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현실 속의 한국 아이들은 요즘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2014년 11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아동종합실태조사에서 한국 아이들의 삶의 만족도는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꼴찌였습니다. 한국 아이들의 ‘삶의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60.3점이었는데 한보다 한 등수 위인 루마니아도 76.6점으로 16점 이상이나 높았다고 하죠.

일반적인 만족도만 낮은 게 아닙니다. 이 조사에서는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과 같은 빈곤 가정의 아이들 절반 정도가 밥을 굶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 멀리 아프리카 어디쯤의 최저빈곤국이 아니라 선진국 진을 자랑하는 여기 대한민국의 이야기입니다.

 

개인적 이야기를 하자면, 18년간 해온 신문기자의 일을 접고 아이들을 위한 구호개발단체에서 일하겠다고 결심할 때만 해도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들’은 저개발국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설마 한국에서 많은 아이들이 여전히 굶고 맞고 버림받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자라면서 겪는 고통의 세기가 저개발국의 아이들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열악한 상황에 처한 아이들이 내 이웃에 있을 거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한국의 고속성장과 선진국 진입이라는 배경그림과 대비되어 아이들의 현실이 매우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뿌리 깊고 일상화된 고통인데도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다는 것, 더욱이 저는 이전 직업이 신문기자였는데도 그랬다는 것이 부끄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지금도 뉴스의 사회면을 펼치면 곳곳에 아이들의 비명이 배어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물건을 훔친 여섯 살 어린이의 버릇을 고치겠다며 무술 학원 강사가 연습용 목검으로 엉덩이 백 대를 때렸다는 기사가 눈에 띄네요. 여섯 살 아이가 백 대씩이나 매를 맞아 마땅한 잘못이란 게 세상에 있기나 한 걸까요? 그런데도 유난히 한국에선 아이들을 때리는 것이 ‘훈육’이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고정관념이 강합니다.

2014하반기 한 지방법원은 가출이 잦던 열네 살 딸을 설득하다가 목검으로 때려 숨지게 한 아버지에게 겨우 징역 6년을 선고했습니다. 낮은 형량도 문제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판결문에서 눈에 띄는 건 법원이 “사건 당일의 폭행도 설득과 훈육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고 판단한 대목입니다. 1시간 반 동안 주먹으로 폭행하고 목검으로 온 몸을 30여 차례 때린 행위가 ‘설득과 훈육’이라니 그저 아연해질 뿐입니다.

 

제가 아동인권을 옹호하는 일을 4년가량 해오며 느낀 것은 어른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선 생활의 질을 높이자며 ‘웰빙(well-being)’을 말하지만, 아이들에겐 전혀 다른 ‘웰 비커밍(well-becoming)’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잘 살기보다 미래에 잘 살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만 어린 시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래에 성공하기 위해 초등학생이 거의 자정까지 그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한다거나, 미래에 훌륭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지금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거나 등등 어른들은 아이들에 대해 늘 미래를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행복한 어린 시절 없이 행복한 어른 되기가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행복한 미래’를 말하면서 어른들은 정작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현재의 행복’을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002년 아동권리를 주제로 열린 유엔특별총회에 모인 세아이들의 선언문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미래’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또한 ‘현재’랍니다.”

 

우리 사회도 이제 아이들의 ‘현재의 행복’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이들이 현재의 삶이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닙니다. 지금 이 사회가 힘들다고 하는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이건 국가나 부모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어른들 모두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제가 대학생인 여러분께 말을 거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2002년에 유엔특별총회에 모인 아이들의 선언문엔 또 이런 말도 나옵니다. “우리는 아동에게 꼭 맞는 세상을 원해요. 우리 아이들에게 맞는 세상은 모든 사람에게도 맞는 세상일 테니까요.”

힘센 사람들이 아니라 약한 사람들도 살기에 힘겹지 않은 세상이 우리에게도 좋은 세상일 겁니다. 가장 약하고 작은 인간인 아이들의 입장에 서서 바라본다면 지금 우리의 세상은 어떤가요? 아주 가까운 곳, 개개인이 살아가는 작은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약한 인간의 권리가 제대로 존중받지 못한다면, 더 큰 세상에서의 보편적 인권이란 헛된 말이 될겁니다.

 

국민대신문 1월호에 실린 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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