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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

6시에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만두자’였다. 현기증이 일고 식은땀이 난다. 이러다 죽겠다..겁이 덜컥 난다.
그대로 누워 있으면 일어나기 더 힘들 것같아 겨우 몸을 일으켜 수련장에 갔다.

사범 설명을 들으니 오늘은 등산을 간단다. 해발 885m의 백운산을 오른다고. 아니, 4일째 굶은 사람들을 데리고 등산을 간다고? 미쳤나? 난 안간다.
단식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며 아침체조와 명상을 따라 했다. 그런데....
신기하다. 기진맥진한 뇌가 생각을 멈춰버린 모양인지, 드디어 명상시간에 잡념없는 집중이 되는 거다!

흔히들 명상을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실제로 해보니 그건 도무지 고수가 아니고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그게 어떤 상태인지 감조차 잡히질 않는다.
내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명상에 대한 정의는 '명상 나를 바꾼다'라는 책에 나오는 것으로 "한 번에 한가지 생각만 하는 것"이다.
호흡을 세며 명상을 할 땐 호흡만 생각하는 것, 촛불을 바라보며 명상을 할 땐 촛불만 생각하는 것, 소리를 내며 명상을 할 땐 그 소리에만 집중하는 것...이런 방식으로 마음이 훈련된 뒤에야 자신에 대해서도 명상할 수 있게 된다고 들었다.

말은 쉽지만, 한 10분만 해보면 안다.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마음은 좀처럼 의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오죽하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마음은 정말 원하는 곳만 빼고는 어디든지 달려가는 야생마와 같다"고 했겠는가.
며칠 명상 수련을 하는 동안, 아주 짧은 순간 집중이 가능하다가도 마음은 금새 또 엉뚱한 데로 흘러가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자, 이제 그만하고 다시' 이렇게 스스로를 달래가며 집중을 시도했는데, 이날은 호흡 명상을 하는 동안 사범이 '그만'이라고 말할 때까지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마음 속에서 뭔가 다부진 기운, 힘 같은 게 스멀스멀 생겨나는 느낌이다. 등산? 한번 해보지, 뭐.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등산을 오전 10시반쯤 시작했는데 거의 꼬박 하루가 걸렸다. 내려오니 오후 5시가 다 되었다. 가장 공포에 질려있고 등산을 못하는 사람을 선두에 세웠기 때문이다. 좀 속도를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땐 선두의 느린 걸음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결국은 그 덕분에 천천히 산을 충분히 즐기면서 등산할 수 있었다. 속도의 강박에서 풀려난 등산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거의 하루 종일 산에서 움직였는데도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음식이 그리 많지는 않구나, 싶다. 정상에서 따끈한 꿀물을 마셨는데, 그 맛!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산에서 내려오니 분위기가 약간 달라진다. 그동안 배가 고파 얼굴이 굳어있던 사람들 얼굴에 약간씩 생기가 돈다. 4일을 굶고도 산 하나를 완등했다는 게 사람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 같은 걸 주었나보다. 뿌듯해하는 기색이 모든 사람들 얼굴에 역력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왕 하는 것, 적극적으로 참여해보자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하루종일 하드 트레이닝을 마치고 나니 오히려 몸도 개운해졌다. 사범에게 그냥 6일 내리 단식을 해보겠다고 다시 이야기했다. 그녀가 등을 두드리며 잘 생각했다고 격려해준다....

냉온욕 후 밤엔 소리 명상을 했다. 특정한 소리를 반복해 내면서 명상하는 이 방식을 신비주의자들은 ‘만트라 명상’이라고도 부른다. 대개 ‘옴~’하는 소리를 내거나 특정한 기도의 문구를 반복 암송하거나 하는데 여기선 ‘아~’소리를 주문했다. '아~'소리를 내며 오롯이 자신만 생각하라는 주문.

꼭 무슨 발성 부흥회 같다. -.-; 마뜩치 않았지만 늘 한 발 떨어져 관찰하려 드는 고질적 습성을 버리고 일단 따라가 보자 생각했다.
내가 책에서 읽은 '만트라 명상'은 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 것인데 여기선 크게 내라고 한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시간이 조금 흐르니 여기저기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남들의 흐느낌을 들으니 좀 난감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느낌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냥 '자신'만 생각하라는 거였는데 왜 '나의 꿈, 희망' 이런 것 대신 '나의 실수, 돌이킬 수 없는 과거' 그런 것들만 줄줄이 생각이 나던지.....울컥해지는 기분이다.
사범이 다가와서 등을 쓸어주고 명치끝을 두드려주니 마치 뭔가 토해내듯 내 눈에서도 울컥 눈물이 터진다.....
당황스럽지만 시원했다. 꽤 많이 운 것같다. 괴로운 기억들을 꽤 많이 게워낸 기분....
오래 기억하고 싶은 나 자신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고, 포장 없이도, 가식 없이도 자연스러운 나 자신 그대로 살 수 있을 것같은, 근거 없는 믿음이 피어올라 허허로운 속이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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