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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대신, 그는 냉정하고 고결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여름의 어스름 속에 선 채, 그녀가 허둥지둥 해변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힘겹게 자갈밭을 헤쳐나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작은 파도들이 부서지는 소리에 묻히고, 그녀의 모습이 창백한 여명 속에서 빛나는 쭉 뻗은 광활한 자갈밭 길의 흐릿한 한 점으로 사라져갈 때까지. 
 
-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내겐 '올해의 발견'인 작가다. 올 봄 비행기 안에서 그의 소설 '속죄' 를 원작으로 한 영화 '어톤먼트' 를 보고 그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몇 달 뒤, 우연히 대학 때 내가 혼자 좋아했던 친구가 번역자인 게 눈에 띄어 '이런 사랑'을 읽었고, 그 뒤로 '체실 비치에서''암스테르담' 을 내처 읽었다.

'체실 비치에서'는 아주 짧으면서 긴 이야기다. 며칠 전 밤에 읽기 시작해 새벽 5시까지 다 읽곤 책장을 덮으며 그만 울어버렸다.
책 속에서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바꿔놓은' 사건은 아주 사소하고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놓쳐버린 기회, 사랑도 모두 젊음의 오만함, 미숙함, 어설픈 자존심, 그런 턱없는 사소함들 때문에 놓쳐버린 것이 아니던가....
누구든 자기 인생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것, 사람의 모습을 대입해 읽을 수 있는 책.
단, 지나간 일에 대해 아무런 회한이 없는 분, 사랑이든 뭐든 잃어본 적이 없는 분,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스토리, 선명한 감정을 선호하는 분에겐 비추. 이거 뭐 이래, 하는 생각에 책을 던져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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