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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중에서 -

몇 번씩 반복해 읽은 시구를 따라 먼 산 바위 옆에 서 있을 갈매나무를 그려본다. 아내도 없고, 집도 없어지고, 부모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 낯선 거리를 헤매던 한 사내가, 어느 목수네 집 추운 곁방을 얻어 옹색한 불에 손을 쬐며 자신의 슬픔과 어리석음을 되새김질하다 그 괴로움에 짓눌려 죽을 것만 같다던 사내가, 마음이 가라앉을 즈음 고개를 들어 그려봤을 갈매나무. 마른 잎새가 쌀랑쌀랑 눈을 맞을, 쌓인 눈에 잔가지가 뚝뚝 부러져도 굳게 버티어 서 있을 갈매나무. 

그렇다. 이 쓸쓸한 사내처럼, 누구나 마음 안에 굳고 정한 갈매나무 하나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엔 버리고 또 버려도 희미하게 미소짓는 어떤 것이 끈질기게 남아 있어서, 희망을 품기보다 '완전히 절망'하기가 더욱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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