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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밑줄긋기

소시지 기계

sanna 2008. 8. 17. 05:24
옛날에 두 대의 소시지 기계가 있었다. 한 대는 열심히 돼지고기를 받아들여 소시지를 만들었지만 다른 한 대는 '돼지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람' 하는 생각으로 돼지에 대한 관심을 끊고 자기 내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내부는 더 공허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결국 이 기계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 버트란트 러셀 '행복의 정복'에서-

석달 전,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을 때 나 자신이 텅빈 내부만 들여다보는 소시지 기계처럼 느껴지던 날들이 있었다. 걸으면서 본 것이 오직 나 자신 뿐이었던 날들. 내 자책, 내 후회, 내 불안...그러려고 길을 떠난 것이 아니었는데도.

낯선 풍경과 사람들, 세상의 무수한 사건들은 내가 관심을 기울일 때에만 내 경험이 된다. 어디서든 뭔가를 얻고 싶다면, 근사한 풍경과 만남, 사건이 날 찾아와주기를 기대하기 이전에 우선 나 자신으로부터 바깥으로 눈을 돌릴 줄 알아야 했다. 그 길에서도. 그리고 여기에서도.

두달 전 마쳤던 여행의 경험을 밤새 정리하면서, 다시 그 길을 걷는 듯한 기분이다. 그때는 뭔지 잘 몰랐던 느낌이 시간이 흐르고 보니 명료해지기도 한다. 어떤 일을 겪든 사람이 저절로 변화하는 경우란 없는 것같다. 변하기로 '선택'할 뿐이다. 그 선택이 당장은 겉으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무엇보다 어떤 경우든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선명한 인생의 메타포를 갖게 되어 그 길을 걷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이 잘 안보일 땐 그 길에서 모진 비바람이 불 때 무작정 걷던 일을 생각한다. 그 길에서 언덕을 오를 때마다 저 너머엔 뭐가 있을까 상상했다. 때론 좋은 사람, 멋진 경치, 또 때론 진창, 메마른 자갈밭을 만났다. 무엇을 만날 지 내가 고를 수 없다는 걸 절감하면서 모든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느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나간다는 걸,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가 걷는 길은 어디쯤일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답은 자명하다. 걷는 일 뿐이다. 조금 지나면 배낭을 내려놓고 쉴 바위를 만날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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