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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걸 이긴다. 시련 뒤에 기쁨이 있고, 신념은 산도 움직인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이 있는 법…. (코웃음을 치며) 흥! 말이야 참 좋지.”

―영화 <몬스터>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에일린의 마지막 내레이션 -

오랫동안 완치되지 않는 질병을 되풀이해 앓는 사람이 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병이 도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안타깝지만 마땅한 위로의 말이 생각나질 않아 “앞으론 괜찮아질 거야”를 반복하던 내게, 그는 “나도 그렇게 생각해”하면서 시니컬하게 덧붙였다. “더 나빠질 수가 없거든. 이제.”

바닥을 쳤으니 올라갈 일만 남지 않았느냐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그냥 삼키고 말았다. 그건 바닥까지 떨어져보지 않은 사람들이나 하는 말일는지도 모른다. 기어 올라가다 몇 번씩 다시 떨어지면 그 바닥은 점점 더 아득해질 것이다. 시련 뒤에 기쁨은커녕 더 큰 시련을 거듭 만나는 경험을 한 사람들 앞에서 희망이니, 사랑이니 하는 말들은 별 소용이 없을 때가 많다. 에일린의 비웃음처럼 미사여구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몬스터’(DVD·마블엔터테인먼트)를 보는 것은 괴롭다. ‘이래도 희망이 있다는 둥 그딴 소릴 계속 할래?’라며 보는 이를 고문하는 영화 같다. 더군다나 이건 실화다. 미국에서 여섯 명의 남자를 연쇄 살인한 혐의로 2002년 사형당한 에일린 워노스의 삶을 영화로 옮겼다.

영화를 보기 전엔 제목 (monster·괴물)이 흉측한 여자 주인공에 대한 묘사라고만 생각했는데, 영화에서 그건 에일린이 놀이공원의 회전차를 가리켜 한 말이었다. 어린 시절에 놀이공원의 울긋불긋한 회전차가 예뻐 보였는데 사람들은 그걸 ‘몬스터’라고 불렀다고, 무척 타고 싶었는데 막상 타고 보니 한 바퀴도 못 가 멀미가 나더라고…. 살아남으려고 몸을 팔았고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적응하지 못했으며, 사랑에 희망을 걸었지만 그 애인에게도 번번이 이용당하고 배신당하기만 한 에일린에게 인생은 ‘몬스터’였을 것이다.

하지만 에일린을 동정하다가도, 그가 선량한 사람까지 살해하는 대목에 이르면 더 이상 그의 불행에 공감하기가 어렵다. ‘몬스터’와 싸우다가 그 자신이 ‘몬스터’가 되어버린 형국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에일린처럼 완벽한 절망에 갇혀 ‘내 입장이 되어 겪어보기 전엔 안다고 말하지 말라’고 절규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다만, 희망에 대해 중국 사상가 루쉰(魯迅)은 이런 말을 했다. ‘희망이란 본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애초부터 땅 위에 길이란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을 밝은 미래를 긍정하며 걸음을 내딛는 자의 결의로 종종 인용하지만, ‘소년의 눈물’을 쓴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 교수는 루쉰의 이 말에서 어두움을 읽었다.

그의 다음과 같은 해석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다’고 절망하는 나의 친구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루쉰이 희망이란 본래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할 때 그는 희망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거의 없다’라고…. 인간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걸어가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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