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A라는 소프트웨어 회사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고객사 B는 먼 도시에 있다. 어느 날 A가 설치해준 소프트웨어에 문제가 생겼다고 B에게서 연락이 왔다. 보통 이럴 땐 엔지니어 한 사람 보내지만, B가 중요 고객이었으므로 A는 엔지니어 둘을 파견하고 사장까지 날아갔다. 막상 가서 보니 별 게 아니었다. 문제를 쉽게 해결한 뒤 B 사장이 A 사장에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이런 일로 이렇게까지 와 주시다니. 정말 감동했습니다.”

칭찬에 쑥스러워진 A 사장이 말했다.

“뭘요. 아무 것도 아닌데요. 우린 늘 이렇게 해요.”

B 사장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좀 이상하다고 느낀 A 사장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아, 그렇지 않아도 이 도시에 와보고 싶기도 했거든요. 야경도 좋고, 음식들도 다 맛있고, 어떻게든 기회가 되면 오고 싶었어요.”

B 사장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A사와의 관계는 이후…….


이거 실제 상황이었다고 한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 할 때, 흔히 겸손하고 좋은 말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A 사장처럼 굳이 칭찬을 거절해가며 겸손하고 편하게 대한다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다. 내가 베푼 호의가 호의인 줄 상대방이 알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A 사장은 뭐라고 말했어야 할까, 하는 질문에 하수와 고수의 대답은 달랐다. (나 같은) 하수는 “잘 해결되어 다행이다. B사가 저희에게 얼마나 중요한데, 당연히 와야죠”같은 얄팍한 아부성 멘트를 떠올린 반면, 고수(로버트 치알디니)의 대답은 “도와드릴 수 있어서 저도 기쁩니다”처럼 프로페셔널의 자부심과 겸손이 동시에 담긴 멘트였다.


더랩에이치 김호 대표가 운영하는 ‘설득의 심리학 워크샵’에 다녀오다. 이 워크샵은 ‘설득의 심리학’의 저자 로버트 치알디니가 실전에 적용하는 설득의 방법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인데 김호 대표는 치알디니 팀에서 인증 받은 국내 유일의 트레이너다.


위에 든 것보다 극적이고 재미난 사례가 많은데 워크샵에 쓰이는 내용이라 내가 여기서 다 까발릴 순 없고, 워크샵은 치알디니 교수가 정식화해놓은 설득의 6가지 원칙, 즉 상호성, 호감, 사회적 증거, 권위, 일관성, 희귀성의 원칙을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응용할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자리였다. 

참가자들은 기업 대표, 임원들부터 신부님, 소설가, 의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설득의 원리에 대한 강의, 참가자들끼리의 토론, 제시된 특정 상황에 대한 팀 사이의 경쟁 프리젠테이션 등으로 진행됐는데 처음엔 '왜 자꾸 숙제를 주고 그래'하고 가볍게 투덜대던 분들도 나중엔 경쟁에 빠져드는 분위기. 

사람들이 둘러앉은 원탁마다 미니레고, 색종이, 색색의 나무 스틱들, 작은 고무공들이 놓여있길래 이건 뭔가 했더니 지루할 때마다 부러뜨리고 주무르고 찢고 손장난 하라고 늘어놓은 거라고 한다.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대목. 평소에도 손을 가만 못놔두는 내가 부러뜨린 나무 스틱이 도대체 몇개였는지 셀 수 없을 정도. 


설득의 원칙 중 인상적이었던 두 가지만 예로 들면, 첫번째 상호성.

상호성은 모든 문화에서 공통된 원리다. 사람은 받은만큼 준다. 책 "협력의 진화"에서도 다양한 전략을 대결시키는 게임에서 최종 우승자는 처음에 일단 협력하고 그 뒤부터는 받은 대로 똑같이 돌려주는 팃포탯 전략이었다. 이 협력의 방식과 워크샵에서 강조한 설득에서의 상호성 원칙에 차이가 있다면, 상대가 내게 하는 그대로 상대에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라는 것이다. 진부한 천사표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건 소소한 마케팅 전략에도 쓰일 수 있는 원칙이다. 예컨대 커피빈처럼 10번 펀치를 찍으면 한잔 공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포인트 카드로 과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한다. 펀치를 한번 찍어서 준 포인트 카드와 그냥 새 포인트 카드를 주었을 때 그걸 받은 사람이 다시 와서 커피를 사마시는 재구매율은 앞의 경우가 34%로 뒤의 경우(19%)보다 높았다. 이게 선물과 상호성의 힘인 거다. 

주고 답례하는 증여의 원칙에 대한 고전이라 할 "증여론"에서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도 "자발적으로 주는 것"은 "결코 틀릴 염려가 없는 인류의 지혜"라고 말한다. 마오리 족에는 이런 속담도 있다. 

"마루(Maru. 전쟁과 정의의 신)가 주는 만큼, 마루는 받는다. 그러면 좋다, 좋다."

포인트 카드의 펀치처럼 선물은 꼭 물건을 뜻하는 건 아니다. 만나서 대화할 때 철저하게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것도 선물이다. 둘이 앉아 이야기하는데 상대방이 문자메시지 다 확인하고 내 말을 듣는둥 마는둥 문자 답장 보낸다고 정신 없을 때 얼마나 짜증나는지 떠올려보면, 상대방이 내 말에 온전히 집중해주는 태도도 상당히 귀한 선물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또 하나는 사회적 증거의 원칙. 

이건 "남들은 다 이렇게 합니다"를 설득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인데, 처음 들을 땐 남들 하는대로 하라며 은근히 다수의 힘을 강요하는 듯해서 시큰둥했다. 그런데 한참 듣다보니 예전에 내가 사용했던 정반대의 부정적 사회적 증거가 떠올랐다.

회사에 다닐 때 전체 기자를 상대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한 일이 있었는데 마감 날까지 응답률이 10%를 겨우 넘을까말까 했다. 이거 응답하는데 시간이 뭐 얼마나 든다고 이러나 짜증도 나고 한번 더 압박해야 겠다 싶어 전체 메일을 보내 "중요한 조사인데 시간도 얼마 안걸리니까 제발 꼭 좀 해달라. 여태 10%밖에 안했다'고 읍소 내지 협박을 했는데 요지부동이었다. 워낙에 기자들은 비협조적이라 그런갑다 했는데, 워크샵에서 생각해보니 내 설득의 방식이 잘못된 거였다. 나처럼 10% 밖에 안했다고 부정적인 사회적 증거를 제시하면 상대방은 '그럼 나도 안해도 되겠네' 하고 받아들인다는 거다. 그걸 긍정적인 사회적 증거로 바꿔내는 것이 고수의 기술이다. 예컨대 정말 몇개 없지만 그래도 들을만한 응답 사례 몇개를 예로 들어 이렇게 좋은 의견들이 나왔다며, 다른 분들도 더 참여해주시라고 말을 바꾼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래도 기자들이 움직일지는 안해봐서 모르겠지만 ^^; 어쨌건, 나 역시 한창 머리 굵어갈 시절에 부장이 "10시까지 발제 띄우라 했는데 왜 한 놈도 안냈어!"하고 버럭 소리지르면, 정신없이 발제를 쓰다가도 '아, 나만 안낸 게 아니구나'하고 안심하며 저절로 타이핑 속도가 느려졌으니까.^^


교육 한번 받았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이 교육이 내 생각이 달라지게 한 것을 하나만 꼽자면, 설득에 대한 관점의 변화라고 해야겠다. 

이전에는 설득이란 상대를 이기고 내 논리를 관철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이기고 상대가 지는 ‘Win-Lose’의 상황이다. 승패의 상황이지 설득의 상황이 아니다. 제대로 된 설득은 ‘Win-Lose’가 아니라 ‘Win-Win’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를 꺾고 설복시키는 날카로운 논리가 아니라 내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 상대의 뜻도 실현되도록 돕는 협력에 더 가깝다. 결국은 설득도 어떻게 사람 사이에 말과 생각이 막히지 않고 잘 흐르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릴레이]나는 행복하다.[ ]가 있으니까  (17) 2011.01.31
최선을 다해 기억하기  (16) 2010.12.21
NGO가 코카콜라로부터 배울 것  (4) 2010.12.08
늦깎이 학생의 늦은 오후  (22) 2010.06.16
새벽 4시반, 잡담  (12) 2010.06.08
오카리나 배워보세  (18) 2010.05.27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12) 2010.05.23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