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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직후 회사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걸 허겁지겁 뛰어가 간신히 탔다.
한 남자선배가 안에 있다.
태도가 권위적이어서 별로 친하지 않은, 아니 사실 내가 좀 싫어하는 사람이다.
대충 인사하고 문 쪽을 향해 돌아서 있는데, 그가 말을 건다.
“당신, 요즘 고생이 많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살짝 웃으며 건성으로 대답한다.
“아, 예. 고생은 뭐...곧 끝나겠죠, 이제”
속으로 좀 뭔가 거슬린다.
(뭐? 당신? 내가 왜 네 당신이야... 우이씨~)
약간 까칠한 기분... 그 선배가 또 묻는다.
“당신, 원래는 딴 거 하지 않았나? 언제부터 당신이 그 일을 맡았나?”
또 건성으로 대답한다.
“아, 예. 그쪽 담당이 잠깐 어떻게 되다보니 제가 엉겁결에...어쩌고 저쩌고...(저게 근데 계속 당신이라고 부르네? 밥 잘 먹고 와서 기분 나쁘게 뭐 이런 게 다 걸렸어....)”
‘당신’이라는 호칭이 계속 거슬린다. 차라리 ‘야’ ‘너’가 나을 것 같다. 내 성격이 이상한 건가? 연인이 불러주면 따뜻하고 깊은 이 호칭을, 낯선 사람 혹은 싫어하는 사람이 부를 땐 왜 불쾌하고 모욕적으로 느껴질까.
네이버 사전을 찾아봤다. 당신의 뜻은 네 가지다.
1 듣는 이를 가리키는 이인칭 대명사. 하오할 자리에 쓴다.
2 부부 사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3 맞서 싸울 때 상대편을 낮잡아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4 ‘자기’를 아주 높여 이르는 말.
‘당신’이라고 불리는 게 기분 나쁜 건, 3번으로 내가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 않던가. 추돌사고가 나고 운전자 둘이 내려 다투기 시작한다. “당신이 끼어든 거잖아” “이게 어따 대고 당신이야, 당신은. 너 몇 살이야”로 이어지는 드잡이들....낯선 사람, 거리가 먼 사람이 나를 ‘당신’이라고 부를 땐 상대가 우위에 서서 나를 깔본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동일한 호칭이 왜 어떨 땐, 존경과 애정, 친밀감의 표현으로, 또 어떨 땐 공격적이고 불쾌한 언사로 느껴질까.
내 생각엔, 그 차이는 친밀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개인의 영역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
미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이 분류한 인간관계의 거리 중 친밀한 거리는 45.7cm 미만이다. 물리적 공간에서 친밀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이 거리 안에 낯선 사람이 불쑥 끼어들면 불쾌하다.
내 얼굴 바로 앞, 끌어안고 만질 수 있는 가까운 거리까지 올 수 있는 얼굴은 나의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들뿐이다. 그런 거리 안에 누군가가 갑자기 들어오거나, 갑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밀면 불쾌하고 공격적으로 느껴진다.
영화에서 경찰이 피의자 다그치는 장면을 보면 곧잘 “솔직히 안불어?”하면서 얼굴을 거의 피의자 코앞까지 바짝 들이미는 행동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실제로 미국 FBI에서 경찰에게 피의자 다루는 요령을 가르칠 때 피의자에게 심리적 위협을 주는 한 방법으로 갑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대라는 요령을 가르친다고 듣기도 했다.
아래 포스팅한 1인분의 공간 을 취재할 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경찰대 교수에게 한국에서도 그런지 물어본 적이 있다. 인권 침해의 요소가 있어 금지하는 수사기법이라고 했다. 피의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경찰이 그런 규정을 잘 지킨다고 보진 않지만.^^
호칭에도 그처럼 개인의 영역, 친밀함의 경계가 있는 건 아닐까.
친밀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내 영역에 낯선 사람이 불쑥 침범하면 불쾌해지듯, 친밀한 사람만 부를 수 있는 ‘당신’을 낯선 사람이 불쑥 부르면 기분이 나빠진다.
길에서 낯선 이에게 갑자기 바짝 다가서는 게 무례한 것처럼. 낯선 사람은 낯선 사람답게, ‘~씨’라고 불러야 제격이다.
낯선 이의 입에서 들려오는 ‘당신’은 공격적이고 침해받는 기분을 갖게 한다. 얼굴 바짝 들이밀고 피의자 취조하는 경찰처럼. 시비 붙자고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는 무례한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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