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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옆의 좁은 빈 자리에 양복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비집고 앉는다. 어깨가 닿자마자 슬며시 전해져온 불쾌감은 다리를 떡 벌리고 앉은 그 남자의 왼쪽 허벅지가 닿는 순간 수십 배로 번진다.
#낮 12시… 광화문 한 빌딩의 엘리베이터
사람들이 움직일 틈도 없이 빼곡히 들어찬 공간 안에서 최대한 몸을 긴장시켜 다른 사람과 닿지 않으려 애를 쓴다. 층수를 보여주는 문 위의 디지털 표지판, 위쪽의 작은 뉴스 스크린은 정보의 창이라기보다 시선 처리의 어려움을 돕는 도구 같다.
#오후 8시… 종로의 영화관
먼저 앉은 사람들이 자리 잡은 방향에 따라 오른쪽 팔걸이에 팔꿈치를 걸친다. 내리 졸던 오른쪽 옆자리 남자가 잠에서 깼는지 왼쪽 팔꿈치로 ‘내 팔걸이’를 침범한다. 팔걸이에서 양 팔을 다 내린 자세로 있자니 왠지 굴욕적인 기분이 된다.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프라이버시 영역 어디까지… 대인관계 ‘공간의 사회학’
사람의 경계는 피부가 아니다. 거품처럼 개인을 둘러싼 경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침해되었을 때에 깨닫는 경계가 있다. 낯선 이가 가깝게 다가올 때 긴장하는 것은 우리가 특별히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개인 공간을 침범 당했기 때문이다. 만원 지하철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거나 신문을 쫙 펴고 보는 자세는 공공장소에서 자신만의 개인 공간을 확보하려는 무례한 시도들이다. 서울과 같은 과밀도시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개인의 영토를 주장하는가. 당신과 나 사이.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한 거리는 얼마나 될까.》
○ 개인의 영토
호서대 홍기원 교수(산업심리학)는 지하철 광고의 주목도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지하철 좌석 점유 유형을 조사하던 도중 자리가 텅텅 비어있어도 사람들은 가장자리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7명이 앉을 수 있는 지하철 긴 의자는 양끝 가장자리, 그로부터 한 좌석쯤 거리를 둔 자리, 그리고 맨 중앙 순으로 좌석이 찬다.
홍 교수는 “지하철 좌석의 가장자리, 식당이나 카페에서 벽을 따라 배열된 구석자리를 선호하는 것은 신경을 써야 할 주변 사람이 적고, 필요하면 ‘회피’도 가능한 위치이기 때문”이라면서 “이는 공공장소에서도 개인 공간을 유지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남자 화장실에서 바로 옆에 누가 있으면 배뇨시간이 길어지듯 사람도 유전자에 새겨진 동물적 본능에 의해 영토를 지키려는 욕구가 발동한다는 것.
영토에 대한 욕구는 대부분 무의식중에 드러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배리 루백 교수(사회학)가 쇼핑몰 주차장에서 운전자 400명에게 물어본 결과 이들은 대부분 “차를 빼려고 할 때 다른 차가 내 자리에 주차하려고 기다리면 더 빨리 차를 뺀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실제 조사에서는 전혀 달랐다.
쇼핑몰을 떠나는 운전자가 차 문을 열고 차를 움직이기까지 걸리는 평균 시간은 32.2초였다. 그러나 다른 차가 그 자리에 주차하려고 기다리는 경우에는 차 빼는 시간이 39초로 늘어났고 기다리던 차량이 경적을 울리면 43초까지 늘어났다. 이는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자기 영역을 방어하려는 본능적 충동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루백 교수는 분석했다.
어느 위치의 개인 영토를 선호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향이 엿보이기도 한다. 연세대 이성호 교수(교육학)는 학생들이 강의실에서 주로 앉는 자리에 따라 학습 유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앞자리에는 순종적이나 창의력은 떨어지는 모범생, 뒷자리에는 자율적이며 교과진도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학생들, 양 옆자리에는 학습에 대해 회의적인 학생들, 그리고 중앙에는 그냥 학점만 따면 된다는 방관자적 유형의 학생들이 주로 앉는다고 한다.
이 교수는 “좌석 선호도에 따라 학습 성향의 차이도 뚜렷하며 자리를 옮겨 다니면 학습 성향도 변한다”고 설명했다.
○ 모델 그릴땐 2.5∼3m거리유지
화가 났거나 강력한 주장을 펼칠 때 대개의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서며 목청을 높인다. 미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관계의 거리를 친밀한 거리(45.7cm 미만), 개인적 거리(45.7∼1.2m), 사회적 거리(1.2∼3.7m), 공적인 거리(3.7m 초과) 등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범주 안에서 가까운 거리와 먼 거리의 차이를 구분했다.
거리 분류에서 결정적 요인은 ‘그 순간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느끼느냐’이다. 어떤 두 사람이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는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가를 은연중 드러낸다. 예를 들면 배우자가 아닌 이성이 가까운 개인적 거리(76.2cm 미만) 안에 있으면 부적절한 관계일수 있다.
서양화가 김일해씨는 모델과 2.5∼3m가량 떨어진 거리에서 인물화를 그린다. 섬세한 표정 관찰이 필요하면 팔길이 정도로 가까이 앉아 대화를 나눈 뒤 다시 그림을 그릴 때는 이전의 거리로 돌아간다. ‘왜 가까이에서 그리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심리적) 거리를 둔 관찰이 어렵다”고 했다. 1m 미만은 시각적 해석보다 감정의 개입이 우세해지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거리뿐 아니라 위치에 따라 의사소통의 유형도 달라진다. 미국 심리학자 로버트 소머는 캐나다 여자노인병동에서 탁자(가로 1.8m, 세로 90cm)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위치에 따라 얼마나 자주 대화를 나누는지 관찰했다. 그 결과 탁자 모서리에서 직각으로 마주앉은 사람끼리 대화가 가장 빈번했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인데도 옆으로 나란히 앉은 위치보다 2배, 마주 보는 위치보다 6배 더 대화가 많았다.
○ 공간 운영의 전략들
공연기획사 파파프로덕션은 연극 ‘라이어’를 2002년에 개인용 좌석 구분 없이 붙어 앉는 샘터 파랑새극장에서, 지난해에는 등받이와 팔걸이로 개인용 좌석이 구분된 행복한 소극장에서 각각 공연한 적이 있다. 이재원 실장은 “좌석이 넉넉한 쪽보다 개인 좌석 구분이 없는 곳에서 관객 호응의 열기가 더 높았다”고 한다.
고급 한식 레스토랑인 용수산 광화문점의 4인용 식탁 사이 간격은 93cm로 두 사람이 서로 교차해서 다닐 수 있으며, 4인용과 2인용 식탁의 사이는 64cm로 한 사람의 통행이 가능하다. 서로 다른 식탁에 앉은 사람 사이의 간격은 1.3∼1.5m로 개인적 교류가 불필요한 ‘사회적 거리’에 해당하며 한 식탁에서 마주 앉은 사람 사이는 1.2m로 ‘개인적 거리의 먼 단계’다. 김수민 지배인은 “우리 식당은 비즈니스 미팅이 많기 때문에 서로 격식을 유지할 수 있고 대화가 옆자리에 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좌석 배치의 포인트”라고 설명했다.
반면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미국풍 고급 중식당 체인점 ‘미스터 차우’에서 2인용 식탁 사이의 간격은 20∼28cm에 불과하다. 마주보는 좌석은 76cm로 표정에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개인적 거리의 가까운 단계’. 두 식탁의 손님 사이의 간격은 말을 걸어도 어색하지 않은 ‘개인적 거리의 먼 단계’인 96cm∼1m다.
박준석 본부장은 “손님 사이의 거리가 좁다는 불평도 간혹 있지만 낯선 이들끼리도 쉽게 친숙해지는 ‘엘보우 릴레이션십(Elbow relationship)’이 가능하도록 일부러 좁게 배치했다”고 설명한다. 좁은 간격은 이곳이 “단순한 식당이 아니라 문화를 소비하는 사교의 장이자 무대”임을 천명하는 장치다.
이곳에서는 고객이 좌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특성과 목적에 따라 점장이 자리를 배치하는 ‘스타 세팅 시스템’을 활용한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문간자리’에 고객을 안내할 때는 공간 감각을 둔화시키는 ‘러시 인(Rush-In)’전략이 쓰인다. 먼저 점장이 빠른 걸음으로 먼저 가서 의자를 빼고 기다린다. 이는 안내자가 2,3보 앞서 걸으며 고객이 이곳저곳 자리를 살펴볼 여유를 주는 호텔 레스토랑의 안내와 다른 방식이다. 그리고 종업원 9명이 ‘사람의 벽’으로 고객을 둘러싸고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면 종업원들이 사라진 후에도 자리에 대한 불만은 별로 느끼지 못한다.
또 좁게 붙은 2인용 자리에는 관심사와 라이프스타일이 비슷해 보이는 고객을 안내하며, 들어오자마자 눈에 띠는 중앙의 자리에는 시선을 끄는 외출을 즐기는 듯한 고객들을 배치하면 만족도가 높다.
사람이 공간을 만들지만, 거꾸로 공간과 거리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디자인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글=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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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에 있는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 선생이 “불필요하게 크게 지었다”고 후회했다는 곳이다. 그러나 도산서당은 방이 한 칸뿐인 초가집이다. 수수한 맞배지붕에 부엌, 온돌방, 마루의 단출한 구조가 검박함의 극치다.
퇴계는 그곳에서 책을 읽고 잠을 자고 손님을 맞고 후학을 길렀다. 특히 공부방으로 쓴 공간은 2평 남짓하다. 그 안에 책 한 권 펼치면 꽉 찰 정도로 작은 책상이 하나 있었다.
도산서당은 사람이 궈주하는 공간은 꼭 필요한 만큼에 그쳐야 하며 결코 넘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웅변하는 듯하다. 과연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적절한 공간은 어느 정도일까.
인간이 집을 짓기 시작한 건 기원전 5000년 무렵이다. 강원 양양군 오산리, 서울 강동구 암사동 등에 있는 당시 움집터는 지름 3.5∼6m인 원형이거나 정사각형이다. 넓이는 4.5∼9평 정도. 가족을 최소 2명으로 보면 최초의 집이 얼마나 좁았는지 알 수 있다.
70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국민주택’은 전용 면적이 25.7평이다. 5인 가족 기준이니 1인당 약 5평 정도의 공간이다. 전문가들은 성인 1명이 팔다리를 쭉 뻗고 큰 대(大)자 모양으로 누울 때 차지하는 공간이 약 1평이라고 설명한다. 5평은 먹고 자고 놀고 씻고 물건을 보관하는 등 집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규모다.
1961년 영국의 파커 모리스 위원회는 4인 가족이 거주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72m²(약 21.6평)로 규정했다. 이른바 ‘파커 모리스 표준’이다. 역시 1인당 5평 정도다. 동서양 주택의 규모는 비슷하지만 공간 활용은 서로 달랐다. 외국에선 침실 식당 응접실 등 각 방이 고유한 쓰임새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방은 먹고 자고 손님을 맞고 가족이 이야기를 나누는 데 두루 쓰였다.
주택산업연구원 장성수 선임연구위원은 “온 가족이 아랫목 이불에 발을 넣고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모습을 아파트에선 찾아볼 수 없다”며 “아파트의 보급은 가족 관계도 차츰 서양식으로 바꿔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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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사회학/동물 한마리당 150평은 되야…
종의 번식을 위해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것은 동물의 본능 가운데 하나다. 사진제공 에버랜드 |
사파리월드 담당 김희석 과장은 “마리당 공간이 150평보다 좁아지면 동물이 스트레스를 받고 약자의 생존이 어려운 반면 이보다 넓어지면 동물이 자주 눈에 띄지 않아 고객들이 불만스러워 한다”고 설명했다.
이곳 동물은 어릴 때부터 사람의 손에 키워져 온 탓에 야생동물과는 행태가 조금 다르지만 각자의 영토권은 뚜렷하다는 것이 사육사들의 이야기다. 특히 먹이 다툼을 벌일 때나 번식기에 동물은 민감해진다. 김 과장은 “힘 센 지배적 동물은 개인 영토가 넓은 반면, 복종적인 동물은 우두머리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더욱 영토권에 민감한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
이곳은 동물의 힘의 균형을 동등하게 맞춰놓는 것이 중요하다. 사자 무리가 힘이 세서 공간을 너무 넓게 차지하면 사자 수를 호랑이 등 다른 동물보다 조금 줄이는 식이다.
동물 중에는 떼 지어 몰려다니는 종이 있는가 하면 서로 접촉을 기피하는 종도 있다. 바다코끼리 하마 돼지 잉꼬 고슴도치 등은 접촉성, 말 개 고양이 쥐 매 등은 비접촉성 동물에 속한다.
사람들은 흔히 ‘새처럼 자유롭게’를 꿈꾼다. 그러나 스위스의 동물심리학자 하이니 헤디거에 따르면 동물은 종의 번식과 집단유지를 위해 자신들의 영토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는 종간의 공간유지법칙을 ‘도주거리’로 설명했다. 힘이 센 적이 일정 거리에 접근할 때까지는 가만있다가 그 이상 다가오면 달아나는 ‘도주거리’는 동물마다 다르다. 영양은 침입자가 450m 밖에 있어도 달아나지만 도마뱀의 도주거리는 1.8m다.
미국 동물행동학자 존 캘론은 많은 야생쥐를 한곳에 몰아넣었을 때 집짓기나 짝짓기 등 사회조직이 붕괴될 뿐 아니라 생리적으로도 심각한 영향을 받는 ‘싱크’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동물조차 무질서를 견디지 못하며, 때로는 사람처럼 혼자 있을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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