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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리움을 만지다

sanna 2017. 2. 12. 23:44

전시된 뜨개작품의 톡톡한 재질을 만져도 보고 부드러운 표면을 쓰다듬어도 보고 대형 뜨개러그 위에 앉아도 본다. 목도리와 가디건, 지갑, 가방을 뜨개질로 만든 엄마들이 이 작품을 누구한테 왜 주고 싶은지 쓴 사연도 찬찬히 읽어본다. 그렇게 걷다보면 "옆도 뒤도 돌아보기 무서웠던 때 뜨개바늘을 잡고 직진만 했던" 엄마들이 그 보들보들한 목도리와 방석, 컵받침 등에 촘촘히 녹여 넣은 고통, 그리움, 애달픔이 온 몸으로 전해져온다. 보드라운 방석들을 쓰다듬다가 옆 벽면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속마음 말들을 읽다 보면, 울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다.

세월호 엄마들의 뜨개 전시 '그리움을 만지다' (~19일, 서울시민청 갤러리) 는 컵받침 2800개가 별처럼 공중에 걸개로 떠 있고 알록달록한 색감의 뜨개작품들로 장식되어 포근하지만, 그렇게 몸의 감각을 모두 사용해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와락 눈물이 터질 수 있으니 꼭 손수건을 준비해서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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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간 날에는 엄마들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처음에 인사를 할 때 엄마들이 "2학년 O반 OO 엄마입니다"라고만 소개하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다. 세월호 유족이라는 정체성이 엄마들의 삶을 무겁게 짖눌러 버렸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개인 OOO씨로서 겪는 삶의 다른 순간들도 많을텐데, 오늘은 아이들보다는 엄마들의 시간인데, 엄마들도 이름이 있으니 OO엄마 OOO입니다,라고 소개하시면 더 좋았을 것을....

아니나 다를까, 사회를 보시던 정혜신 박사님이 내 맘을 읽기라도 하신 듯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면서 말씀하신다. "여러분, 혹시 화법의 차이를 눈치채셨나요? 엄마들이 말을 할 때는 주어가 늘 '우리 엄마들은' '저희들은'으로 시작해요. 개인 이야기를 하는 게 낯설어서 그러시기도 할텐데요...오늘은 '저희들' 말고 '나는'이라고 말씀하시고, 대변인같은 외교적 이야기 말고 (웃음) 자기 이야기만 해주세요."

엄마들은 여전히 '나는' 이라고 말하기를 어색해 하셨다. 그러면서 조금씩 풀려나온 이야기들. 유족들이 밥먹으면 먹는다고 손가락질, 웃으면 웃는다고 손가락질하는 주변의 시선이 힘들었다. 사람이 늘 울고만 있는 것은 아닌데 유족의 모습은 우는 모습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꾸 스스로를 속이게 되더라. 치유공간 이웃은 그런 남들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처음으로 편하게 마음을 부려놓을 수 있었던 공간이다...힘든 일에 대처하는 방식이 가족 간에도 서로 달라서 힘이 들 때가 많다. 나는 나가서 미친 듯 활동해야 숨통이 트이는데 아이 아빠는 아예 나가질 않는다. 떠난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가족 간에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어야 치유가 된다는데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족끼리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렵다. 서로 겁이 나서 아직도 그렇게 안 된다....

남은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 해야 하는데 못해서 마음에 걸린다는 한 엄마에게 정혜신 박사가 물었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잠깐 뜸을 들인 뒤 그 엄마가 대답했다. "내가 아프지 않고 잘 사는 모습 보여주는 거죠..."

또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자식을 잃은 내 엄마에게 10년 전 내가 했던 말이다. 남은 생을 '아들을 잃은 엄마'로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프지 말고 엄마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으면 뭐든 하면서 잘 사시는 걸 보고 싶다고. 그리고 오늘 그 엄마의 대답처럼, 엄마들도 이미 안다.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엄마들이 그렇게 '나'라는 주어를 찾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 영화 '컨택트'를 본 뒤 한동안 마음에 맴돌던 질문을 오늘 전시장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나무 줄기 같은 조형물에 목도리가 전시된 뒤켠 벽면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엄마는 다시 태어나도 네 엄마일 거야"

별 일 없고 평온한 상태였더라면 흔하고 진부한 애정표현처럼 들렸을 이 말이 세월호 엄마들을 통해 나오면서 진부함을 훌쩍 뛰어넘어 절실해진다. 마치 영화 '컨택트'에서 루이스 박사의 말처럼.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난 모든 걸 껴안을 거야.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반길 거야."

루이스 박사는 "당신 인생을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있다면, 그걸 바꾸겠느냐?"고 묻는다. 10년 전쯤 탐독했던 니체의 질문과도 비슷하다. "악령이 찾아와 이렇게 묻는다고 치자. 네가 지금 살아왔던 삶을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것이란 없고 모든 고통과 쾌락, 탄식이 같은 순서로 찾아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지금의 나는 선뜻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러나 루이스 박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다시 껴안겠노라 대답한다. 세월호의 엄마들도 그 모든 낯설고 가혹한 고통을 겪은 뒤에도 다른 사람이기를 바라지 않고 "다시 태어나도 네 엄마"이기를 소망한다. 영화 속에서 자기 운명이 달라기지를 원치 않았던 강인한 루이스 박사처럼, 삶을 덮친 비극적 우연에 질식해 버리지 않고 뜨개바늘을 지팡이 삼아 모진 시간을 건너가는 세월호의 엄마들도 강한 사람들이다. 그 힘이 어처구니 없고 황당한 이 세상이 그래도 폭삭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힘 중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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