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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sanna 2006. 10. 22. 13:00

차 없으면 꼼짝도 할 수 없는 미국을 자전거로 횡단하겠다니, 남들이 “미쳤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정도의 일이면 ‘독도 수호’ 또는 ‘불우이웃 돕기’같은 대의명분이 있을 법도 한데 웬걸, 저자는 “그냥 재미있어서”란다.


홍은택 씨가 쓴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을 읽다. 한겨레신문 ‘책 지성’ 섹션에서 가끔 읽던 연재물이었는데 책으로 묶인 걸 보니 또 다르다. 자동차 부품이 만들어지는 컨베이어 벨트를 쭉 따라가면서 보다가 드디어 ‘완제품’ 자동차를 시승하는 기분이랄까.


단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저자는 2005년 여름 80일간 자전거를 타고 미국 동쪽 끝 버지니아 주 요크타운부터 서쪽 끝 오리건 주 플로렌스까지 6400km의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달렸다고 한다.

1976년 미국 건국 200주년을 기념해 몇몇 사람이 개척한 이 길은 자전거 전용루트나 직선의 횡단 길도 아니고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를 가장 돌아가는 길이다. 서울에서 부산을 열두 번 왕복해야 하는 거리다. 이 생고생이 ‘하고 싶은 일’이었다니...특이한 취향이다. -.-;


저자는 14년간 해온 신문기자 일을 접고 ‘인생의 후반부로 들어가는 통과의례’로 이 고생스러운 자전거 여행을 선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고난의 행군일지가 아니라 맨 몸으로 한판 크게 놀아본 사람의 기록이다. 독자가 이 책을 읽는 가장 맞춤한 자세도 맥주 한 캔을 들고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저자의 여행에 동참해보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서문에 자신이 ‘기록에 젬병’이라고 썼지만 책을 읽다보면 이 말이 엄살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된다. 길 위의 일들을 어찌나 시시콜콜하게 묘사했는지 저자가 핫도그 빵에 소시지를 끼워 먹을 때 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까지 눈앞에 그려질 정도다.


한없이 지루한 ‘페달 150만 번 돌리기’로 끝날 수도 있는 자전거 여행이 독자에게도 흥미로운 모험으로 변모하는 것은 저자의 해학적 글쓰기 덕분이다. 하루 동행자였던 데이비드를 묘사하는 대목이나 인적 없는 대평원에서 페달을 밟으며 느닷없이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같은 노래를 흥얼거린 이야기를 읽다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길 위에서 저자가 만난 온갖 부류의 사람들도 흥미롭다. 명상의 방법으로 자전거 여행을 하는 젊은 여성이 있는가 하면 점점 더 높은 자리에 연연하는 욕심을 스스로 끊기 위해 회사 중역 자리를 내던지고 자전거에 오른 사람도 있다. 가파른 산길에 살면서 30여 년간 자전거 라이더들을 보살펴온 할머니 ‘쿠키 레이디’의 사연은 감동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한 바퀴 한 바퀴 자전거를 굴릴 때마다 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오던 것들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 온” 저자 자신의 변모 과정이다.


대개의 사람들처럼 자전거 여행 이전의 저자에게도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선분일 뿐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저자는 조금씩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로키산맥을 넘기 위해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고 믿었다. 후지어 패스에 오르는 순간 절정의 감격 같은 것을 기대했지만 그런 강렬한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목표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서 그냥 마음이 편해졌을 뿐이다. 그런데 그 뒤부터 페달을 밟는 게 즐거워졌다. 페달을 밟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과정이 됐다.”


저자는 자전거 타기를 통해 “자신이 페달로 밟은 몇 미터의 거리에도 성취감을 느낄 줄 아는 삶의 한 방법”을 배운다. 성취지향적인 사람이 과정을 즐길 줄 아는 낙관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하니, ‘인생의 하프타임’에 이만한 소득이 또 있겠는가... 책을 읽다가, 나도 떠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으로 괜한 몸살을 앓다....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홍은택 지음
언론인인 저자가 2005년 5월 26일부터 8월 13일까지 80일 동안 미국을 자전거로 횡단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동쪽 끝 버지니아주 요크타운부터 서쪽 끝 오리건주 플로렌스까지 40킬로그램의 짐을 싣고, 6400킬로미터의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따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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