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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주중에 계속 내가 들여다보고 써댄 활자들이 전해주던 추잡한 소문과 전혀 상관이 없는 글자들을, 걸신들린 듯 읽어대다.


글자라고는 쳐다보기도 싫을 줄 알았는데... 일종의 대체물이 필요했다. 가글을 한 뒤 물을 뱉어내듯, 그렇게라도 입안의 깔깔한 말들을 뱉어내고 싶다.


토마스 만 단편집에서 <키 작은 프리데만 씨>와 <어릿광대>를 읽다.

두 작품 모두 <토니오 크뢰거>의 변주곡 같다.
키 작은 프리데만 씨가 불구가 된 토니오라면, 어릿광대의 주인공은 우울증에 걸린 토니오라 할까.


토니오 크뢰거.

예민한 청년 토니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패배자이고 더 많이 괴로워한다는 가혹한 교훈을 (난 스무살을 넘기고도 한참을 지나서야 깨달은 이 비밀을...)
14살 때 터득한, 감수성 예민한 청년.

삶과 예술의 중간을 끊임없이 배회하면서 그 어느 쪽과도 화합할 수 없었던 영원한 아웃사이더...


소설을 읽을 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오버랩해 주인공의 형상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버릇이 있다.

토니오에 가장 적당한 배우는 누굴까.


내가 캐스팅한 배우는 제이크 길렌할.


체격이 크다는 것이 좀 단점인데, 다소 왜소한 체격의 몸에 제이크 길렌할의 표정을 결합한다면....딱 토니오다.


제이크 길렌할은 <투모로우>와 <브로크백 마운틴>에 잇따라 나와 이제 스타가 되어버렸지만, 난 그 배우를 <도니 다코>에서 처음 봤다.


좀 어리버리해보이지만 섬세하고 예민해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사물의 뒷면, 미묘한 주름을 기어이 보아버리는 기질.
단순한 핵심보다는 미세한 주변을 더 살피는, 그렇게 주저하고 배회하는 기질 때문에 늘 주류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청년.



그런 역할을 맡기엔 제이크 길렌할이 제 격이다. 

지금은 할리우드 스타가 되어 표정도 너무 밝아졌고 근육질 몸매가 되었지만, 난 이전의 우울한 표정의 그가 더 좋다.




토니오의 친구 리자베타는 그를 “길 잃은 시민”이라 불렀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이 지배하는 세계와 예술의 세계 사이에서, 토니오는 섬세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사물의 어둡고 슬픈 면까지를 들여다보는 예술가의 세계 대신, 일상성의 환희가 지배하는 단순하고 명랑한 삶의 세계를 동경했다.  그러나 어느 세계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던, 두 세계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방황했던 길 잃은 시민이다.


난 ‘저주받은 예술가의 운명’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삶-예술 사이에서 갈등한 적도 없다.

하지만 토니오에 대해 강렬한 공감을 느끼는 것은 그가 방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 여전히 방황하는 캐릭터를 사랑하는 것도....일종의 불치병이다....ㅠ.ㅠ)


하지만 곧잘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와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 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면, 당신은 방황하는 사람이다.

안주할 것인가 초월할 것인가의 사이, 타협할 것이냐 지향할 것이냐의 사이, 일상성과 의미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삶.

방황하는 사람은 정답을 얻기 어려운 질문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어쩌면 질문 그 자체가 곧 답일지도 모를 질문을.


토니오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종류의 인간한테는 올바른 길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필연”이라고.


헤매는 토니오적 인간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반지의 제왕>에서 톨킨이 들려줬던 ‘위로’를 덧붙여주고 싶다.

“방황하는 사람들이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토니오 크뢰거 - 문예세계문학선 45  토마스 만 지음, 강두식 옮김
192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주요 작품들이 수록된 단편집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토니오 크뢰거를 비롯하여,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정신적 영향이 짙게 드리워진 '환멸', 예술 정신과 시민정신의 극단적 대립을 그린 '트리스탄', '마리오와 미술사' 등 총 네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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