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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언하는 어떤 것도 믿지 말라고 여러분에게 요구한다! 단 한마디도 믿지 말기를! 이것만은 정말이지 재차 경고해야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그것이 인생의 기본적 진리라고 나는 ‘추측’한다.”
20세기의 거장으로 꼽히는 철학자가 말년에 한 강연의 서두치곤 신선하지 않은가?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나를 의심하라’니! 그것도 이렇게 강경한 어조로 말이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로 유명한 철학자 칼 포퍼(1902~1994)의 책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를 읽다. 1994년에 쓰여진 책이지만 이번에 국내에 출판됐다.
이 책은 칼 포퍼가 1980년대 중반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 썼던 수필과 강연 원고 모음집이다. 포퍼의 대표 저작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 ‘추측과 논박’을 이미 읽었다면 반복적 주장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포퍼의 저작을 접해본 적이 없는 독자에겐 ‘포퍼 입문서’로 제격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에 가장 맞춤한 독서법은 평생에 걸쳐 과학과 역사 이론을 검토하고 반증하며 진리에 다가가려 매진한 원로 철학자가 들려주는 삶의 태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글 모음집이라 다루는 폭이 넓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비판적 합리주의’와 ‘낙관주의’다.
포퍼가 말하는 합리주의자란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다른 이에게서 배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진정한 합리주의자는 “상대를 설득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야기하는 내내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남의 마음을 사로잡기 바라는’ 지식인, ‘확실성 없이 살아갈 용기’가 없어 예언가를 기다리는 대중 모두 포퍼의 비판을 비껴가지 못한다. 시행착오와 오류의 수정은 생물의 진화에서도 거의 유일한 진보의 수단이었다.
포퍼는 “모든 생은 문제해결의 과정”이라고 단언한다. 동물의 생이 바로 그러하다. 동물의 눈이 물체와의 충돌을 피하도록 경고를 받기위해 발달된 기관이듯, 우리의 감각기관은 특정한 생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형성된 도구에 불과하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도 ‘문제’가 관찰이나 감각 인식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어떤 도그마도 인정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는 포퍼의 경고 대상에는 ‘무제한의 자유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 인류가 ‘공존’한다는 것에는 당연히 ‘모든 개인의 무제한적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사실 뉴라이트 진영에선 칼 포퍼를 시장 방임론의 이론적 근거로 신봉하다시피 하지만, 포퍼만큼 한국사회의 특수한 지형에서 왜곡되어 받아들여진 철학자도 없을 것이다.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쓰게 된 동기도 나치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마르크시즘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쏟아냈으나 포퍼가 전체주의 못지않게 비판한 대상은 자유방임주의였다.
이 책에서도 포퍼는 ‘자유시장을 절대적 가치로 추구하는 이념적 원리’를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을 경우 자유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기오염 같은 문제는 특별법 제정을 필요로 하며, 빈곤 문제의 해결을 시류에서 벗어난 문제로 돌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낙관주의’다. 포퍼는 낙관론자를 자임하면서 자신의 낙관주의는 “미래가 아니라 오직 현재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구분 짓는다.
포퍼는 평생에 걸쳐 비판했던 마르크스와 자신의 차이를 낙관주의를 기준으로 설명한다. 마르크시즘은 역사의 발전을 믿는 반면 (포퍼의 설명에 따르면) ‘탐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바라보는 냉소주의적 역사관’이다. 반면 포퍼는 진보의 법칙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정치적 세계 중에서는 최고라고 믿는 낙관주의자다.
좌우대립의 양극화 시대에 포퍼의 낙관론은 곱씹어볼만한 대목이 많다. 그는 ‘낙관주의는 의무’라고까지 주장한다. 미래가 열려있고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퍼는 ‘이데올로기라는 색안경을 버리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좌우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어느 한 정당이 나서서 이념 전쟁의 기계를 해체하고 공동의 인도주의적 노선을 채택하자고 제안하라’고도 조언한다.
포퍼가 ‘나는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를 설명한 대목도 재미있다. ‘쓸모 있는 일’에 관심이 많아 가구제작자 자격증명서까지 획득한 그는 단 한번도 철학자가 되려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학교 교사에서 전문 철학가로 ‘진화’했다. 그 비결을 포퍼는 “나의 것으로 간주한 ‘문제들’이 철학을 포함한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할 수밖에 없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진정 사랑에 빠질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바칠 멋진 ‘문제’ 하나를 찾아보기, 해법을 열심히 찾되 우리가 생각해내는 해법은 전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늘 잊지 말기,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므로 늘 겸손해야 하며 모를 때는 모른다고 인정할 줄 알기. 포퍼가 권하는 공부 방법론이다. 아니, 어쩌면 인생 방법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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