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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스타’ ‘왕의 남자’ ‘황산벌’ 등을 만든 영화감독 이준익은 몇 달에 한번씩 띄엄띄엄 보는데도 내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사무실 근처를 지나가다 전화해서 마침 시간이 맞으면 커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사이.
일로 만날 때도 일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떠들며 놀다가 돌아오곤 한다.
그 이전의 흥행 기록을 모두 깬 '왕의 남자'이후 무척 유명해졌는데도 그는 여전히 한결 같아서 좋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땐 그는 "키드캅이라고 뭐 그런 영화 한번 만들어봤어"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소규모 영화수입사 사장이었다.
몇 편의 영화로 '뜬' 뒤에도 그는 여전히 '라디오 스타라고 뭐 그런 영화 한번 만들어봤어. 보러와"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추석 직전 인사동의 어떤 화랑 마당에서 찍은 사진>
추석 직전, 일 때문에 인사동에서 이준익 감독을 만났을 때, 그는 스포츠 모자를 눌러쓰고 스쿠터를 타고 나타났다. (그의 하늘색 스쿠터도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데....난 아직도 '블로거 정신'이 부족하다...-.-;)
“다 늙어서 웬 오토바이 족? 이게 뭐야, ‘국민’감독이?”
“에잇! 뭔 소리야. ‘국민’, 나 그런 거 싫어. 저거 돌돌이야. 돌돌돌돌돌~ 하잖아”
“저거 느리지 않아요?”
“시속 50km가 최고 속도일껄? 그 이상 빨리 다녀야 할 이유 없잖아?”
“차림새하곤...감독님은 어떻게 나이를 거꾸로 드세요?”
“난 태어나자마자 죽은 사람이라서 그래. 점점 어려지는 수밖에 더 있어?”
“그럼 죽을 때 감독님 유언은 ‘응애~’ 뭐 이렇겠네?”
“헤헤, 그럼, 그럼.”
그는 잘 웃는다.
미소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들었다. 가짜 웃음인 ‘팬아메리칸 미소’(없어진 항공사 팬아메리칸 승무원들의 미소에 빗댄)와 마음에서 우러난 진짜 웃음인 ‘뒤셴 미소’. 사람이 뒤셴 미소를 지을 땐 양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눈꼬리에 까마귀나 매발 같은 주름살이 생긴다. 이 감독은 웃을 때 늘 그렇다.
그를 만난 건, 원고 집필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친분을 내세워 강요했건만, 죽어도 안하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내가 졌다. ㅠ.ㅠ 안하겠다는 핑계를 대다대다 못해 자긴 글씨를 싫어하고 '난독증'이라 책도 만화책만 본다고 오리발이다. -.-;
겨우 그가 말하고 내가 정리하기로 타협을 봤다. 워낙 말이 많은 양반인데다, 말을 하다보면 (그의 표현대로라면) “쥑이는 방언”을 자주 한다. 그 ‘쥑이는 방언’을 아주 많이 한 날,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 마음 속의 별- 영화감독 이준익의 신중현 예찬>
내가 신중현의 노래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담임선생님이 번호대로 돌아가며 앞에 나와 노래를 부르라고 시켰다. 내 순서가 되기 전, 고심해서 노래를 골랐다. 내가 얼굴이 빨개진 채 앞에 나가 부른 노래는 신중현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였다. 아이들이 다 따라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생이 ‘반달’ 같은 동요 대신 유행가를 불렀는데 선생님이 아무 말 없었던 것도 이상하다. 선진적이었다고 해야 되나?
그 후 용기백배해 노래 부를 일만 있으면 신중현의 노래를 불렀다. ‘빗속의 여인’ ‘님은 먼 곳에’ ‘커피 한잔’ ‘봄비’…. 40대 후반이라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신중현의 노래는 어릴 때 정서적 갈등을 채워 주던 음악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신중현은 외국 대중문화를 배우고 익혀서 록 음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든 사람이다. 어린 아이의 입에도 신중현의 노래가 착착 달라붙었던 이유가 그래서가 아닐까 싶다.
중고교 때는 양희은, 트윈폴리오 등 포크송 시대가 열렸는데 신중현이 TV 출연 금지를 당하면서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신중현 흉내 한번 안 내 본 남자는 없을 것이다. 여자들, 그리고 요즘 세대는 이해 못하겠지만 그땐 남자들에게 기타를 들고 대중 앞에 서서 주목받는 데 대한 환상이 있었다. 스타에 대한 선망을 처음 가져 본 대상이 신중현이었다. 골방에서 신중현의 ‘늦기 전에’ 기타 코드를 연습하며 무대에 서는 상상으로 지새운 밤이 부지기수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대학 2학년 때였다. 활동을 중단했던 신중현이 1980년에 ‘아름다운 강산’을 들고 돌아왔다. 국수적인 노래였지만 록의 파워가 물씬했다. 암울한 시대를 노래하는 허무가 짙게 밴 이전 노래들과 달리 ‘아름다운 강산’에서는 그의 음악이 긍정적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올해 은퇴를 위한 전국 투어를 한다고 하는데, 너무 소리 소문 없이 진행돼 안타깝다. 50년 연주생활 거인의 은퇴식이 그렇게 치러지다니…. 우리가 현존하는 빈티지(vintage·품위 있는 옛것)에 얼마나 인색한지를 보여 주는 풍경이다. 그러면서 외국에서 롤링 스톤스가 오면 난리가 난다. 지구 반대편의 빈티지에 부화뇌동하고 우리의 빈티지에는 인색한 거다.
나는 영화 ‘라디오 스타’에서 우리의 빈티지가 소중한 가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20여 년간 명멸한 로커들에게 바치는 오마주(homage·경의)라고 생각하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에서 영월의 ‘이스트 리버’ 밴드 역을 연기한 노브레인이 주인공 최곤(박중훈)에게 “신중현의 대를 잇는 유일한 로커이신 최곤 선배님”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 나름대로 록의 족보를 만들어 본 것이다. 한국 록 음악의 아버지가 신중현이라면 아마 전인권과 닮았을 최곤은 맏형쯤이며 노브레인은 그 맥을 잇는 막내라고 설정했다. 중반 이후 노브레인에게 ‘아름다운 강산’을 부르게 한 것도 한국 록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거였다.
난 족보 없는 문화란 없다고 본다. 이 나라는 변화가 너무 빨라 그런지, 외세 침입에 의해 과거가 전복되어 버린 경험 탓인지 ‘선배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관습이 있다. 그러나 과거, 외부의 영향을 온전히 단절해 버린 상태에서의 ‘나’가 가능하기나 할까. 내가 받은 과거의 모든 영향, 내 안에 축적되어 온 관계, 그런 것들이 ‘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나’는 곧 내 안에 축적된 역사가 아닐까. 내게 필요한 건 ‘연대감’ ‘관계’이지 ‘차이의 부각’ 혹은 ‘과거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그래서 아예 영향, 족보, 그런 것들을 두드러지게 노출시키는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게 ‘라디오 스타’다.
창작자로서 신중현에 대해 기질적 연대감도 느낀다. 신중현은 미군부대에서 음악을 배웠지만 미국 록 음악을 흉내 내지 않고 자신만의 한국 록을 만들지 않았는가. 나도 ‘모델’이 없는 영화를 만든다. ‘황산벌’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는 그 이전의 어떤 외국 영화에 대한 오마주가 없다. 내 목소리를 만들어 가는 사람으로서의 동질성이랄까, 그런 연대감을 느낀다.
신중현은 음악적 테크닉도 훌륭하지만 기질이 더 멋있는 사람이다. ‘라디오 스타’에 신중현의 곡을 사용하기 위해 3월에 찾아가 뵌 적이 있다.
그때 신중현은 자신이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들려줬다. 중학교 때 영등포역 앞 악기점에 가서 제일 멋있어 보이는 바이올린을 샀는데 어떻게 소리를 나게 하는지를 당최 알 수가 없어서 기타로 바꿨다고 했다. 그게 그의 연주생활의 시작이었다.
고교 때는 클럽 연주자를 찾아가 막무가내로 오디션 봐 달라고 졸랐고 가르쳐 주겠다고 하자 그 이튿날 학교를 때려치웠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고민할 시간에 연습하고, 망설일 시간에 몸을 던져버리는 사람이다. 3월에 만났을 때도 스스로 실천한 인간의 파워가 눈빛에 그대로 드러났다. 정말 멋졌다.
그날 신중현에게 내가 “록은 뭡니까”하고 물었더니 “록은 정신”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정신은 바로 “자유”라고…. 그 말씀이 잊혀지질 않는다.
내가 그날 신중현에게 한 약속이 있다. “10만 명쯤 모아 무료로 선생님의 공연을 하고 싶다. 무보수로 출연하실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무대가 있다면 너무 행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년에 그걸 해야 하는데 걱정이다…. 한강 둔치나 밤섬 같은 곳에서 해질 때 시작해 해뜰 때까지 로커들이 무보수로 출연해 무료로 온 관객들과 그냥 노는 거다. 그렇게 젊은이들에게 ‘족보 있는 록’의 진면모를 경험하게 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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