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고 있던 블로그가 문득 생각났다. 아직 살아는 있나 싶어 주소 www.bookino.net 을 치니 사이트에 연결할 수 없다는, 그런 IP를 찾을 수 없다는 안내 문구가 뜬다. 엉? 왜 그러지? 하다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메일. 몇달 전에 블로그 주소와 관련한 뭔가의 만료시한이 곧 다가오니 연장을 원하면 어디로 가서 뭐 하라는 안내 메일을 본 것도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개씩 쏟아지는 스팸메일더미 속에서 그걸 읽고 아, 그런가, 나중에 해야지, 하고 잊어버렸는데, 내버려둔 사이 시한이 지나 저 주소가 사라져버린 거다. 블로그를 시작할 때부터 쓰던 주소인데 아쉬워서 되살려볼까 싶어 여기저기 뒤져보다가 그냥 포기했다. 간단히 검색해봤는데 확장명만 다를 뿐 같은 이름의 주소들이 이미 많아 어느 소도시에나 ..
역시 리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에서----- "냉소주의는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포장하는 방식이다. 냉소주의자는 자신이 쉽사리 속지 않고 멍청하지 않다는 점을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내가 곧잘 접하는 냉소주의는 오히려 둘 다에 해당할 때가 많다. 염세적 경험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이 종종 순진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은 냉소주의자들이 실질보다 스타일을, 분석보다 태도를 앞세운다는 것을 말해준다.(...)단순화가 무언가를 그 본질로만 압축하는 일이라면, 지나친 단순화는 그 본질까지 내던지는 일이다. 지나친 단순화는 여간해서는 확실성과 명료성을 허락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쉼없이 그것들을 추구하는 일이고, 섬세한 뉘앙스와 복잡성을 명쾌한 이분법 속에 욱여넣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순진한 냉소주의..
“삶이 그런 것인데도 사람들은 종종 착각해요. 안정적인 삶, 평온한 삶이 되어야 그때 비로소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요. 이것은 착각입니다. ‘지금 사정이 여러모로 안 좋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이 일을, 혹은 공부를 할 수 없어. 나중에 좀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 본격적으로 할 거야’라고 하지만 그런 시간은 잘 오지 않아요. 아니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한동일의 ‘라틴어수업’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갑자기 뭐라도 쓰고 싶어졌다.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 (오래 쓰든 안쓰든) 내게는 중요하(다고 오래 생각해왔)다. 아마 예전처럼 일 삼아 매일 쓰는 삶은 다시 살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그런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여유가 생기면 뭐라도 써야지 ..
오래되고 고요한 물건들을 보고 싶어 중앙박물관에 갔다. 신안해저문화재 흑유자 특별공개전. 695년 전 침몰한 무역선에 실려 있던 찻잔과 다기들. 그 시절에 유행했던 거품을 내는 차에 어울리는 먹빛의 찻잔들. 종이를 잘라 장식한 치자꽃 무늬며, 1300도의 고온에서 흘러내린 유약이 만들어낸 토끼털 무늬며. 거의 700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칠기처럼 윤기가 흐르는 자기들을 들여다보면서 공들여 이 물건들을 빚어냈을 도공들을 상상한다. 심한 두통으로 친구들과 함께 가기로 한 트레킹을 취소한 주말, 김서령 작가의 부음을 들었다. 오래 전 내가 일했던 신문사에 실린 칼럼으로 처음 알게 됐던 사람. ‘생활칼럼니스트’라는 필명, 따뜻하고 담백한 글이 인상적이었다. 무심한 듯 마음으로 스며드는 글이랄까. 그의 글이 좋..
⑤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대부분 타인이 얽혀 있는 우리 삶의 문제들은 예고 없이 불쑥 일상을 깨뜨린다. 저자의 집에 어느 날 ‘들이닥친’ 살구 더미처럼. 저자의 삶에 끼어든 문제적 타인은 어머니였다. 평생 불화해온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고, 저자는 어머니와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어머니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두텁지 않은 부피의 산문이지만 이 안에 짜여 들어간 이야기들을 다 펼쳐 놓으면 대작이라 불러도 무색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에게서 시작해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 아이슬란드 여행, 체 게바라와 친구들을 거쳐 다시 어머니와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야기들을 매끄럽게 연결하는 직조의 기술이 놀랍다. 수식어들의 도움 없이도 얼마나 글이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범으로 나는 ..
④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사람됨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초사회성을 지닌 동물이니 태어나면 저절로 사람됨이 갖춰지는 걸까.인류학자인 저자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사회는 무엇인지 묻는 거대한 질문을 촘촘하고 유려하게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사회를 유기체나 벌집 같은 구조 대신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펼쳐지고 일렁이는 공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얻게 되었다.저자는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빌려와 사람됨을 설명한다. 몸과 달리 그림자는 만져지지 않지만, 마음과 달리 눈에 보이며 일정한 자리, 즉 장소를 필요로 한다.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라 소설에서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배척당한다. 사람이 된다는 건 이를테면 그런 그림자를 갖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필요한 사회적 성원권..
③ 몽테뉴 수상록 | 미셸 에켐 드 몽테뉴. 표지와 제목이 풍기는 근엄한 이미지 때문에 하마터면 이 귀한 책을 지나칠 뻔 했다. 수상록은 추상적 사색보다 몽테뉴의 깨알 같은 경험과 자유로운 생각으로 가득한 책이다. “나는 나 자신을 연구한다. 이것이 나의 형이상학이고 나의 물리학”이라고 선언한 사람답게 몽테뉴는 자신의 이야기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인간적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 최초의 인간이다.그는 보르도 고등법원 심의관으로 일하다 38세에 퇴직한 뒤 20년간 이 책을 썼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 중 비인간적인 것은 없기 때문”에 사람이 겪는 거의 모든 일을 소재로 삼았다. 슬픔, 공포심, 우정, 줏대 없음, 술주정, 심지어 자신의 용모와 방귀에 이르기까지 수다스럽다고 할 정도로 써댔다. ..
②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 셔윈 눌랜드. 이 책의 구판을 선물받았을 때는 20대 후반이었다. 삶이 창창했을 뿐 죽음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때였다.수십 년간 죽음을 지켜본 의사인 저자가 ‘존엄한 죽음’에 대한 이상이 실제와 거리가 멀다고 설명할 때, 두렵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됐다. 평온한 종말은 착각이었다. 모든 생명체가 죽음으로 생의 무대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건 자연의 섭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예컨대 노화로 방광 조절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도 그 섭리의 일부라는 자각엔 몸서리가 쳐졌다.저자는 최후의 승리는 늘 자연이 거두게 돼 있는 섭리를 억지로 외면하는 인간의 총체적 저항을 ‘불필요한 의지’라 불렀다. 끝없이 치료를 시도하는 의료진의 행위가 무의식중에 환자를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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