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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아빠에게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 사는지 물어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널 위해 내 모습과 내가 사는 집을 그려봤단다. 이 그림을 잘 간직해주렴.”
산타 할아버지를 궁금해 하는 세 살배기 아이 존을 위해 아빠가 산타인 척 하면서 쓴 편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후 23년간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산타클로스의 편지가 배달됐답니다. 산타클로스를 더 이상 믿지 않을 만큼 존이 자란 뒤엔 마이클 크리스토퍼 프리실라 등 그 아래 동생들이 차례로 수신인이 됐죠.
눈 범벅이 되고 북극 우표가 붙은 편지들은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간 다음날 아침 집에서 발견되거나 우편배달부가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쓴 답장은 아무도 없을 때 벽난로에서 사라졌고요.
그 오랜 세월 한결같이 편지를 보낸 산타 할아버지는 누구일까요? 그는 20세기 최고의 판타지 문학인 ‘반지의 제왕’ 3부작을 쓴 영국 학자 J.R.R 톨킨입니다.
그가 1920년부터 1943년까지 자녀들에게 쓴 이 편지들을 그의 사후에 가족이 엮어 ‘북극에서 온 편지’ 라는 예쁜 책으로 펴냈습니다.
(위의 그림은 톨킨이 아이들에게 보낸 첫 편지에 직접 그린 그림입니다. 영문판엔 이 그림이 표지에 올라와 있더군요)
아이들에게 쓴 편지와 그림을 모았지만 어린이 책은 아닙니다. 요즘의 영악한 아이들이 보기엔 따분할 지도 모릅니다. 국내 번역본은 어린이가 보기엔 활자도 너무 작습니다.
그보다는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 ‘반지의 제왕’을 읽었거나 영화를 본 성인들이 볼만한 어른용 판타지 동화라고 해야 알맞겠네요.
톨킨이 우표와 편지봉투 소인까지 직접 만들어 보낸 정성도 놀랍지만, 일부러 산타 할아버지의 떨리는 필체로 쓴 편지와 상상력이 풍부한 일러스트레이션은 절로 감탄을 자아냅니다. 그림 실력도 정말 탁월하더군요.
톨킨 그 자신이 4살 때와 12살 때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수도사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편지와 그림들은 더 애틋합니다. 자신은 제대로 받지 못했던 부모의 사랑을 아이들에게 듬뿍 주려는 듯 환상의 세계를 꾸며 들려주는 아버지의 따뜻한 정성이 갈피마다 스며 있어요.
이런 뒷이야기 말고도 이 책은 그 자체로 멋진 판타지 스토리입니다. 처음에 산타 할아버지의 식구는 북극곰뿐이었다가 점점 늘어나 눈 요정들과 붉은 땅의 신령들 눈사람들 동굴 곰, 북극곰을 방문하러 왔다가 눌러앉은 사촌 박수와 발코투까 등이 등장합니다.
사고뭉치 북극곰의 실수로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대한 불꽃놀이가 일어나 북극 전체를 까맣게 만들고 별들을 다 흔들어 뽑아버리고, 달을 네 조각으로 깨뜨려 그 속에 살던 남자가 우리 집 뒤뜰에 떨어지고 마는” 사고가 일어나는가 하면, 사슴들을 훔쳐가는 도깨비를 혼내주기 위해 산타는 황금 트럼펫을 불어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죠.
산타 뿐 아니라 북극곰도 굵고 각진 글씨체로 가끔 편지를 쓰거나 산타의 편지에 낙서를 했는데, “영어 대신 나만의 글자 아크티크를 만들었다”면서 희한한 인사말을 들려주기도 한답니다. 톨킨이 이후 ‘반지의 제왕’에서 직접 만든 엘프, 고블린 종족의 언어도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요.
톨킨이 편지를 쓰던 후반부는 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세계를 휩쓸 무렵이었습니다. 잔인한 세상에서도 아이들이 환상의 힘을 잃지 않도록 톨킨은 계속 도깨비를 물리친 북극곰의 맹활약을 들려주고 아이들에게 “비참해지지 말자”는 격려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언제까지 자라지 않도록 하는 마법의 주문은 톨킨에게 없었던 모양입니다. 톨킨은 아이들이 차례로 14살이 될 때마다 “양말을 올해까지만 걸어두었으면 좋겠구나”하고 부드러운 인사를 전하며 환상의 세계에서 떠나보냅니다.
1943년 막내딸 프리실라가 그 나이가 되었을 때 톨킨이 보낸 마지막 편지는 그 오랜 세월 멋진 판타지의 세계를 운영해온 아버지가 산타의 이름을 빌어 딸의 유년 시절에 바치는 슬프고도 따뜻한 작별 인사입니다.
“이제 “잘 있어”라는 인사를 해야겠다. 하지만 널 잊지 않을 거야. 우린 옛 꼬마친구들과 그들이 보내준 편지를 잘 간직하고 있단다. 그들이 자라서 집을 꾸미고 아이들을 낳게 되면, 우린 다시 만날 거라 믿고 있지.…네가 바라던 것들을 찾게 되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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