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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1일. 한 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잃었는지 경건하게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웬걸,
독감의 고열로 정신이 오락가락입니다. 감기약 먹고 자다 오후에 눈을 떠서 아직 1일 아니야? 라고 묻는 얼떨리우스가 되어 새해를 맞자니 한심하긴 해도… 더 한심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소설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를 읽으면서 킬킬대다보니 이것도 그리 나쁘진 않군요. 닉 혼비의 이 소설을 권해드리는 것으로 새해 인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피버 피치’ ‘어바웃 어 보이’등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닉 혼비의 작품은 발표되는 족족 영화화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역시 영화배우 조니 뎁이 제작을 맡아 내년에 개봉된다는군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자살하는 날인 12월 31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자살하는 곳인 런던 토파스 하우스 꼭대기에 인생 낙오자들이 모여듭니다. 10대 소녀와의 스캔들 때문에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전직 토크쇼 진행자 마틴, 중증 장애인 아들을 둔 50대 여인 모린, 언니가 행방불명이 된 뒤 방황하다 남자친구에게도 차인 10대 소녀 제스, 록 가수의 꿈이 박살난 제이제이….
각자 삶을 끝장낼 결심을 하고 하나둘씩 토파스 하우스 꼭대기로 모여들지만 한명씩 등장할 때마다 엄숙하고 비밀스러운 순간이 슬랩스틱 코미디로 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오죽하면 가장 나중에 피자 배달 가방을 들고 역시 남 못지않게 우스꽝스럽게 등장한 제이제이가 “자살이란 세상을 버텨내기 힘든 섬세한 사람들이 하는 건데… 파출부처럼 생긴 중년부인과 소리를 질러대는 실성한 10대, 얼굴이 벌건 토크쇼 호스트, 이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데…”라고 실망스러워 할 정도죠.
엄숙한 비밀 의식을 결행할 고독과 정적의 시간을 빼앗겨 버린 이들은 앉아서 너는 왜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이야기를 시작하고 서로 도대체 그게 자살할 이유가 되냐고 빈정거리기 시작합니다. 자살 대신 엉뚱한 소동으로 새해 아침을 맞은 이들은 일단 90일만 더 살아보자고 약속하게 됩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고 닮은 점도 전혀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세밑에 어떤 결심을 하고 한 곳에서 만났다는 것 때문에 서로 동지가 된 듯 한 기분을 느끼게 되죠. 서로가 불행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러므로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이죠.
90일간 온갖 희한하고 우스꽝스러운 소동들이 일어납니다. 자살 결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만날 일도 없을 사람들이 서로 얽히면서 불쌍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웃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을 겪게 되죠. 닉 혼비의 장점은, 이 무거운 이야기를 이렇게 코믹하게 쓰면서도 경박하다는 인상을 전혀 주지 않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90일이 지난 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살아있음이 축복’이라고 생각이 확 바뀐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뿔나게 나아진 사람도 없습니다. 마틴은 여전히 낙오자이며 이웃집 아이 과외선생으로 살고 있고, 모린은 여전히 중증 장애인 아들을 돌보며 제스는 미심쩍은 남자를 사귀기 시작했고, 제이제이는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만 옆자리 가수보다 인기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상황은 약간씩 바뀌었습니다. 인생이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 그 상황이 바뀌게 된 거죠. 모린이 여전히 중증 장애인 아들을 돌보는 처지이지만, 간호사들과 우연히 퀴즈 팀을 시작하게 되었다거나 신문가판대에서 별것도 아닌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거나 등등의 사소한 상황 말입니다.
“그렇게 빨리 바뀌지도 않았고, 극적으로 바뀌지도 않았으며, 그들이 상황을 바꿔보려고 많은 일을 한 것도 아니었고, 또한 곰곰이 생각해보면 별로 나아지게 바뀐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별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바뀌었다는 것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힘인가 봅니다. 마틴은 이렇게 말하죠.
“어쨌든 우린 모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잖소.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죽은 것보다는 살아 있는 걸 더 좋아할 거요. 제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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