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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앗 뜨거워-Heat

sanna 2007. 2. 11. 03:37

언젠가 꼭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적어놓은 내 ‘To Do List’ 중 1번은 요리, 특히 내가 좋아하는 일본 요리를 제대로 배우는 것이다.

요리에 서투르기 짝이 없지만, 날 것의 재료들이 사람의 손을 거쳐 눈과 코와 혀를 통해 오감을 매혹시키는 요리로 변모하는 그 마술 같은 과정은 언제 보고 들어도 매혹적이다.


요리에 대한 매혹에는 어떤 기술에 대한 기억을 머리보다 몸에 저장해둔 장인에 대한 동경도 한 몫 한다.
요즘 나는 토요일마다 어머니 뒤를 따라다니며 요리 레서피 만드는 일을 심심풀이로 하고 있다. 모든 이가 그렇듯 내 입맛도 할머니- 어머니로 이어져 내려온 음식을 최고의 것으로 기억한다. 손대중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으니 표준 레서피를 만들기 위해 어머니께 계량 스푼과 계량 컵을 드리고 옆에서 심부름을 하며 기록하고 있다. 어머니는 손대중일 땐 틀리는 법이 없었는데 계량 스푼을 쓰면서는 곧잘 곤혹스러워 하셨다. 손끝의 기억이란 이렇게 깊은 것이다.


미국 잡지 ‘뉴요커’의 기자 빌 버포드는 요리에 대한 동경이 나보다 훨씬 강렬했던 나머지, 직장을 때려치우고 주방 탐험에 나섰다. 최근 읽은 그의 책 ‘앗 뜨거워 Heat’는 그가 이탈리아 요리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겪은 몇 년간의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뉴욕의 유명한 이탈리아 요리사 마리오 바탈리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인 ‘밥보’의 주방에서 ‘구경꾼 저널리스트’로 1년 이상 일을 했다. ‘정말로 일을 배우는 곳은 책이나 TV나 요리학교가 아니라 주방’이라는 바탈리의 말에 홀려 주방에 발을 들여놓은 저자는 그만 선을 넘어버리고 만다.

바탈리의 스승에게 직접 배우기 위해 영국을 다녀오는가 하면, 직장을 때려 치운 뒤 이탈리아로 떠나 바탈리가 처음 도제 생활을 한 산골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수제 파스타 만드는 법을 배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탈리아에서 전통을 자랑하는 푸줏간에까지 가서 도제생활을 하며 고기 다루는 법을 배운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터라 지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갖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 기대했던 것 만큼은 아니지만, 대체로 재미있다. 책의 중반 정도까진 이 저널리스트의 주방 체험과 바탈리가 요리사가 되는 과정을 교차해서 쓴 논픽션의 재미가 쏠쏠하다. 중년의 위기, 원하는 일을 찾아 떠나는 모험 운운하는 상투적 수사 없이 요리 그 자체에만 집중해서 쓴 것도 마음에 든다.

반면 경험을 압축하고 우려내는 ‘글의 요리’ 과정이 불충분한 건 이 책의 흠이다. 겪은 일을 죄다 풀어놓느라 일단 책이 너무 두껍다. 후반부로 가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탈리아 요리와 재료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는 바람에 약간 질릴 정도다.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저자가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초보 요리사의 몸으로 관찰하고 겪은 ‘밥보’의 주방 풍경이다.

재료를 손질하는 주방 보조에서 출발한 저자는 칼질을 할 때 칼 끝을 도마에 고정시키고 칼날을 앞뒤로 움직이면 힘들이지 않고 재료를 썰 수 있다는 기초적 원리 습득에서 시작해 나중엔 시각 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도 오감을 다 사용해 주방을 인식하는 능력까지 몸에 익히게 된다.


하루의 피크인 저녁 영업시간이 되면 ‘밥보’의 주방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전쟁터와도 같다. 전쟁터와 다른 점이라면 ‘극단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들이 그 비좁은 곳에서 어지럽게 뒤섞인다는 점이다. ‘불을 다루는 태도는 공격적’이되 ‘손으로 요리를 담고 채소를 정렬하며 장식하는 태도는 예술가처럼 섬세’하다. ‘밥보’의 요리사들은 생각이라는 걸 거의 하지 않으며 ‘그들의 기술은 너무나 깊이 뿌리를 내린 나머지 거의 본능처럼 발휘’됐다.


온갖 모욕을 감당하는 주방 생활동안 저자 역시 책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는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해 몸으로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한다. 글을 읽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반면 관찰하고 흉내내는 것을 통해 배우는 방식, ‘성인보다 아이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요리를 ‘몸에 익히는’ 것이다. 따라잡고 싶은 경지다.


고수의 반열에 오른 요리사들의 다중적 면모를 보는 것도 이 책의 재미다.

바탈리는 봄이 되면 토끼고기에 스프링피라는 콩과 어린 순, 어린 당근을 넣은 오렌지 비네그레트를 곁들여 낸다. “단순한 토끼고기가 아니라 토끼의 생각까지 담아내기 위해, 토끼를 먹으면서 토끼가 먹고 싶어하는 것까지 함께 먹기 위해”서다.

요리사들의 칼 다루는 기술에 대한 묘사도 매혹적이다. 고기를 다룰 때 이탈리아의 마에스트로는 저자에게 “칼을 부리는 게 아니라 자네의 손 안에서 칼이 자유로워져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일을 하는 건 칼이지 자네가 아냐. 자네의 손은 칼 속으로 사라졌어.”

요리사들은 이처럼 예술가이자 장인이면서 동시에 냉정한 장사꾼이기도 하다. 바탈리는 틈날 때마다 레스토랑의 본질은 “재료를 사서, 음식을 만들고, 그걸 팔아 이윤을 남기는 것”임을 강조하고 뭐든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은 쓰레기통을 뒤져서라도 다시 건져낸다.


몇 가지 정보를 덤으로 알게 되는 재미도 쏠쏠하다. 요리사들이 스테이크 완성 여부를 어떻게 확인하는지 아시는가? 고기를 찌른 쇠꼬챙이를 입술에 대어보는 것이다. 입술보다 조금 따뜻하면 레어, 체온보다 따뜻하면 미디움레어, 더 따뜻하면 미디움, 뜨거우면 웰던, 이런 식으로 판별한다고 한다. 다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팁. 이 책에 따른다면 문닫기 직전의 식당은 절대로 가지 않는 것이 좋다. 피곤에 절고 후줄근해진 요리사들은 치우고 정리하고 버리려던 것에서 마지막 주문을 위한 재료를 찾아내고 일을 빨리 끝내고 어서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에 대충 요리한다. 문닫기 직전의 식당에서 마지막 주문을 넣었을 때 그 음식이 사랑으로 요리되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맞는 말씀~^^

앗 뜨거워 Heat  빌 버포드 지음, 강수정 옮김
펜을 내던지고 칼을 집어든 괴짜 기자의 파란만장한 주방 모험담을 담은 책이다. 「뉴요커」 기자 빌 버포드는 우연히 요리사 마리오를 만난다. 그 운명적인 만남을 계기로 멀쩡한 직장을 그만둔 후 '주방의 노예'가 된 그는 칼 잡는 법도 모르는 주방의 골칫덩이로 좌충우돌하면서 점차 어엿한 한 명의 요리사로 성장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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