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두 사나이가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지옥-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오디세우스'들... 이들의 귀환은 어떠한 폭압도 인간성을 완전히 말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희망의 증거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였더라면 해피 엔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둘 중의 한 사람, 늘 쾌활하고 낙관주의자였다던 한 사람은 68세에 돌연 자살하고 만다....그는 왜 그랬을까.

서경식 교수가 쓴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읽다. 작고 분량이 두텁지 않은데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엄습하는 아릿한 통증 때문에 도리없이 여러 번 책장을 덮어야 했다. 읽기 힘들지만, 오래 기억에 남을 것같다.
이 책을 덮고보니 몇년 전에 읽은
빅터 프랭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가 떠올랐다. 두 권을 같이 읽으면 어떨까 싶다. 전자가 던지는 비통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후자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쁘리모 레비.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화학자였던 그는 2차 대전 말기 반 파시즘 운동을 벌이다 체포돼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됐다. 전쟁이 끝난 뒤 극적으로 살아 돌아와 자신의 경험과 그곳에서 본 인간의 여러 유형을 증언하는 글을 썼다. 항상 삶을 긍정하는 낙관주의자였다던 그는 1987년 돌연 자살하고 만다.



빅터 프랭클. 유대인이자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였던 그도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3년간 수감됐다. 지옥에서 살아돌아온 그는 실존분석적 정신요법인 '로고테라피'를 창시해 유럽의 대표적 정신의학자가 된다.

두 사람이 내던져진 비인간적인 조건의 혹독함은 아우슈비츠가 어떤 곳인지를 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간 이하이기를 강요하는 그 곳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두 사람이 안간힘을 썼던 일 중의 하나는 '문명의 형식'만이라도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었다.
종종 문화, 문명의 형식은 마치 배부른 자의 여유처럼 생존의 문제 아랫줄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문화, 문명은 생존 다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레비는 '모든 권리를 빼앗겨도 남아있는 한 가지 능력, 즉 (인간 이하, 동물이기를 강요하는 그곳의 폭압과 열악한 환경에) 동의하기를 거부하는 능력'을 전력을 다해 지키려 애썼다. 그 방식은? 아무리 물이 더러워도 아침엔 꼭 세수를 하고, '신곡'을 암송하며, 노래를 부르고, 수용소 어디에도 쓸모없던 외국어를 동료 수인을 통해 배우려 애쓰는 것이다.
프랭클 역시 노래와 시에 의존했으며 유머를 자기 보존을 위한 정신의 무기로 삼았다.  그는 "강제수용소가 인간에게서 모든 자유를 다 박탈하더라도 단 한가지 자유,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지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같은 생각은 그가 이후 '로고테라피'를 창안하는 씨앗이 되었다.


두 사람에 대한 책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대목 중의 하나는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이다.
가해자가 아니라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피해자들인데도, 이들을 괴롭히는 감정은 분노와 적개심 이전에 수치심과 죄의식이다.

프랭클은 '정말로 양심적인 사람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가라앉은 어조로 술회한다.
레비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예민했던 것같다. 그는 생존자들의 죄의식에 대해 '누구나가 그 형제들에게 카인이다'라고 쓴다.
거의 모든 생존자는
수용소에서 자신보다 더 연약하고 교활하지 못하며 더 늙고 혹은 너무 어린 사람들을 돕지 못하고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에 소홀했다는 죄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타자, 그것도 더 마음이 넓고 현명하며 살아있을 가치가 있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살고 있다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이 요령 혹은 행운에 의해서 심연의 바닥까지 가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수치스러워 한다. 그 깊숙한 곳에 빠져 메두사를 보고 만 자는 이미 증언하기 위해서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간인 것에 죄가 있다고 느끼는 수치심을 견뎌내기에 레비의 절망감은 너무 깊었던 것일까....서경식 교수가 이방인으로서의 자신의 경험(그는 재일교포다), 인간 이하이기를 강요당하는 모진 환경에 대한 간접체험(군사독재에 저항하다 고문을 당하고 십수년 감옥살이를 했던 서승, 서준식 형제가 그의 형들이다)을 넘나들며 레비의 죽음을 추적하지만, 그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일부 인간은 인간 이하’라는 생각과 행동이 지구상에 온존하는 한, 레비가 겪은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고 레비의 죽음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그리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얼마 전에 일어났던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 사건만 보더라도 2007년의 오늘, 우리는 '인간이라는 척도'가 복원되었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가 과연 우리는 비인간을 극복했는가, 하는 비통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면, '삶의 의미를 찾아서'는 고통을 이겨낼 개인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는 책이다.


수용소라는 모진 현실속에서도 미래를 향한 목표의식을 잃지않을 때 사람은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다. 프랭클 박사는 그 버팀목이 주로 미래에 대한 희망에서 나온다고 진단한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미래 의식이 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는 특이한 존재다. 아무리 어려운 순간을 맞이했어도 그에게는 미래라는 도피처가 있다. 이 경우에는 착각도 힘이 될 수 있다.

프랭클 박사가 갇혀있던 수용소에서는 1944년 크리스마스에서부터 그해 연말까지 한주일동안 사망자의 수가 급증했다고 한다. 원인은 단 하나, 상당수의 수감자들이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평범한 소망을 품고 있었는데 전황이 여전히 오리무중이자 커다란 절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인간의 저항력을 와해시키는 무서운 힘은 폭압도, 비인간적 환경도 아니고 절망이었다.
사람은 그것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어떤 것', 삶의 의미가 필요하다.


두 권 모두 평이한 문체로 쓰여졌지만 읽기 녹록치 않다. 하지만 꼭 읽어볼 가치가 있다.
개인의 안위 이외엔 관심이 별로 없고 세상이 많이 살만해졌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권한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이 많이 버거울테지만, 불편한 질문에 맞서보는 경험을 통해 삶의 지평을 한뼘쯤 넓힐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고통과 무기력감 속에서 길이 안보인다고 생각하는 분들께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를 권한다. 몇년 전 불안감에 시달리던 나는 이 책 덕분에 동어반복적 자기계발서들의 산더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족이지만 나는 삶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라면 '마시멜로 이야기'니 뭐니 하는 쓰잘데없는 자기계발서들 대신, '삶의 의미를 찾아서' '몰입의 즐거움' ' 아직도 가야할 길' 이렇게 세 권만 읽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삶의 의미를 찾아서  빅토르 프랑클 지음, 이희재 옮김

'나의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추장을 먹은 고래의 마음  (11) 2007.04.11
  (6) 2007.04.04
나는 학생이다  (12) 2007.03.20
공중그네  (10) 2007.02.21
앗 뜨거워-Heat  (4) 2007.02.11
강산무진  (4) 2007.02.04
미래를 경영하라  (12) 2007.01.02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