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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sanna 2007. 4. 4. 01:19

이전에 동화작가 쯤으로 생각했던 로알드 달의 단편소설집 ‘맛’을 산 이유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한 후배가 “이야기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극찬을 해서입니다.
어지간해선 다른 사람의 글 칭찬을 잘 하지 않던 후배라 그 칭찬이 기억에 남아서,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왕창 주문할 때 장바구니에 던져 넣었죠.


첫 단편 ‘목사의 기쁨’을 읽고 난 뒤, 제가 이 책을 단숨에 읽게 되리라는 걸 예상했습니다. ‘이야기의 맛’에 대한 후배의 칭찬은 과찬이 아니더군요.

로알드 달은 반전의 묘미를 가장 잘 구사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 같아요. 10편의 단편소설 모두 허를 찌르는 마지막 한 방을 이야기 끝부분에 감춰두고 있지요.

반전의 맛으로 치자면 맨 앞에 실린 ‘목사의 기쁨’이 제일 좋았습니다. 탐욕스러운 주인공이 시골 사람들을 멋들어지게 속여 넘겼다고 생각하고 뜻을 이루려는 찰나, 모든 것이 헝클어지는 황당한 반전이 벌어지지요.

여러 편의 단편에서 대체로 탐욕스럽고 내기에 집착하며 게임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에게 반전의 일격을 던지는 사람은 의외로 평범한 사람들이더군요.

한 단편에서 얼토당토않은 욕심을 부린 자가 전문성을 가장한 사기극을 완성하려는 찰나, 늙은 하녀의 천연덕스러운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와르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죠.
마치 환상에 대한 일상의 반격을 보는 듯도 합니다. 멋진 꿈의 실현? 천의무봉처럼 정교한 게임의 완성? 이봐, 꿈 깨셔, 인생 구질구질하다구,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요. ^^


10편의 단편 중 재미있는 순서대로 고르라면 ‘목사의 기쁨’ 다음에 ‘하늘로 가는 길’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을 꼽겠어요.

‘하늘로 가는 길’은 소심한 성격 때문에 노심초사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아내가 권위적이고 아내를 조롱하는 듯한 남편에게 날리는 일격이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에선 순박해보이던 여인이 완전범죄를 노리며 짓는 미소가 눈에 보이는 것 같고요.


그런데 솔직히 이 3편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주는 감흥은 그리 크질 않네요.
나머지 7편에도 역시 공들인 반전이 끝부분에 준비돼 있지만, 비슷한 구조가 여러 편의 단편에서 반복되다보니 좀 식상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주방장이 눈앞에서 정성들여 만들어준 초밥을 먹는 대신, 비슷비슷한 모양새의 회전초밥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줄줄이 나와 눈앞에서 빙빙 돌고 있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랄까요. 나쁜 솜씨라고 할 순 없지만, 비슷비슷한 모양새들 때문에 식욕이 달아나는 것 같은 느낌에요....
저처럼 한꺼번에 다 읽지 말고 아껴두었다가 하나씩 하나씩 읽는 것도 그런 '적응'을 물리치고 이 책을 즐기는 방법일 듯해요. 책을 일단 잡으면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테니, 그게 좀 문제이겠지만. ^^


참, ‘맛’을 극찬했던 제 후배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소설가로 등단했답니다. ^^

맛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 의 작가 로알드 달의 베스트 단편집.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과 집착을 흥미진진하게 요리, 최고의 맛을 뽑아내는 로알드 달의 작가적 재능이 마음껏 발휘된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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