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그냥...

서울 속의 브라이

sanna 2007. 8. 20. 00:40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친구가 있습니다. 주말에 친구들과 바비큐 파티를 한다고 오라기에, 남산 기슭 해방촌의 한 연립주택 옥상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하게 됐지요.
  파티 장소를 알리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에 계속 '브라이(braai)' 라고 떠서 무슨 뜻인가 했더니, 남아공 사람들은 바비큐 파티를 '브라이'라고 부르더군요.

오후 5시쯤 도착하니 전부 식탁 주변에 둘러서서 열심히 요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 옆에 가만히 서 있기도 뻘쭘해서, 소스 통에 손을 담그고 꼬치구이 만드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소사티(sosatie) 라는 남아공 요리인데요. 오른쪽 꼬치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양고기와 돼지고기 썬 것과 파인애플, 양파 등을 말레이시아 카레로 양념해 꼬치에 꿰어 구우면 끝인, 아주 간단한 요리입니다.
  남아공 음식문화엔 예전에 유럽인들의 노예로 들어온 말레이시아인들의 문화가 뒤섞여 말레이시아 향료가 꽤 많이 쓰인다는군요. 말레이시아 카레는 매콤하면서도 약간 달달한 맛이어서 꼬치구이 양념에 딱 제격입니다.

  옥상에 올라가 바비큐 그릴에 불을 붙인 뒤 제일 먼저 돼지고기 필레를 구웠습니다.
  그냥 구워도 될 것같은데 등심살 가장자리 살이 얇은 곳을 끈으로 일일이 묶어 전체 두께를 균일하게 만들더군요. 그래야 골고루 잘 익는다면서요.
  왼쪽이 지글지글 굽고 있는 필레입니다. 좀 지저분해 보이죠? ^^;
  하지만, 다 익은 필레를 썰었더니 안이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져 아주 맛있습니다. 소금과 통후추로만 양념을 했는데도 상당히 맛이 있었습니다.

고기가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안주로 내온 빌통(biltong) 입니다.
  오른쪽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빌통은 소금으로 간한 소고기를 말린 남아공식 육포입니다. 그 나라에선 아주 대중적인 간식거리라네요.
  빌통을 가져오기 전에 그게 뭔지 설명하면서 제 친구는 "미국의  저키(jerkey)와 비슷하지만 빌통의 맛을 저키와 비교하는 건 우리에게 모욕"이라고 주장하더군요. ^^ 먹어보니 질기지도 않고 그다지 짜지도 않고 아주 맛있는 안주거리 입니다.

  이후로 쌀 요리 비슷한 꾸스꾸스 (couscous), 구운 소세지, 양고기 구이가 더 나왔는데 빌통이 나온 이후론 카메라를 내팽개치고 먹느라 바빠 사진 촬영하는 걸 까먹었다는...^^;  전 아무리해도 멀티태스커는 못되는 모양입니다. ㅠ.ㅠ
  양고기 다리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작업을 하던 남아공 청년은 계속 양다리로 남편을 때려 죽인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 이야기를 하느라 일에 진도가 안나가서, 밤 10시 넘어서까지 양고기를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 이야기를 한참 듣다보니 로알드 달의 소설집 '맛' 에 나오는 단편이더군요.
  마침 제가 읽은 책이라 아는 체를 하면서 대화에 끼어들 수 있었으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양 이야기로 말이 이어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읽지 않은 소설까지 나오는 통에...뭐 제 아는 체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남아공에서 온 청년이 하루키 소설까지 읽었을 줄이야 상상도 못해봤다죠....끙~ -.-;


  해가 저무니 각 연립주택 옥상마다 소규모 파티를 열고 있는 외국인들이 눈에 띕니다. 해방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더군요.
  서서 왔다갔다하면서 이야기하는 스탠딩 파티 형식은 영 익숙치 않았지만 하늘을 보며 파티를 하는 건 좋았습니다. 낮은 쪽 난간에 걸터앉아 올려다보니 해가 지는 지붕 위로 나무가 걸쳐져 있네요.


  멀리서 해저무는 남산과 불을 막 밝힌 남산 타워도 보입니다. 여기서 사방을 둘러보고 있자니 아파트가 무지 갑갑하게 느껴지더군요. 옥상, 아니면 조각만한 하늘이라도 올려다볼 수 있는 정원이 있는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솟아오르게 만든 저녁이었습니다.

'그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잡담  (8) 2008.01.23
2008년의 말  (8) 2008.01.04
어머님? 누님? 이모님?  (9) 2007.08.29
돈버는 방법도 가지가지....  (20) 2007.08.14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답니까~  (16) 2007.07.22
잠시 집을 비웁니다..  (12) 2007.07.07
어느날의 기도  (12) 2007.07.02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