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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어머님? 누님? 이모님?

sanna 2007. 8. 29. 01:06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던 친구가 얼마 전 귀국했다. 얼마 전 백화점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근처의 한 매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 있지. 조금 전에 저 가게에서 날더러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왜 그러는 거니?”


황당할 수밖에. 일단 그 친구는 아이가 없으니 실제로 '어머님'이 아닌데다, 나이를 먹었어도 별로 나이들어 보이지 않고 '아줌마'보다는 '아가씨'에 가까워 보인다는 자부심(?!)이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통해 짓뭉개졌으며, 그런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좌우간 왜 스무살은 훌쩍 넘어보이는 낯선 총각한테 '어머님'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냔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어딜 가나 그 넘의 ‘어머님’ 호칭이 무척 거슬린다. (음......이렇게 나이 많은 걸 까발려가며 이런 포스팅을 하는 내가 제정신인지 잠깐 망설였다....)
애써 친절한 마케팅을 하겠다고 작심하고 나선 가게일수록 더욱 열심히 '어머님'을 외쳐댄다. 동네의 ‘총각네 야채가게’ 에 가끔 들를 때 보면 호칭이 참 가관이다. 집에서 뒹굴거리다 부스스한 차림새로 나가면 "어머님", 말쑥한 외출복 차림으로 들렀을 땐 "누님"이다. -.-;

과일 왕창 사려고 들렀다가 ‘어머님’ 소리에 그냥 휙 돌아 나와 버렸던 적도 있다. 그런 날엔 바로 옆 ‘형제네 야채가게'가 돈을 번다.

한번은 총각네 점원에게 왜 그렇게 부르는지 물어봤다. (‘어머님’이라 부를 때 물어보면 히스테리 부리는 노처녀 취급할까봐 ‘누님’이라고 부를 때 물어봤다…. -.-;)

나: 그냥 손님이라 부르면 되지 왜 어머님, 누님 그렇게 불러요?

총각: 에이, 정이 없잖아요.

…아놔~ 나 그대들과 정붙일 일 없거든?


오늘 오후에 들른 한 문구 매장에선 더 희한한 호칭을 들었다. 이번엔 “이모님”이란다.....

나: 저기요...근데 왜 이모님이라고 부르세요?

주인장: 네? 아, 네~ (별 걸 다 묻는다는 듯 힐끗 쳐다보고 답이 없다가 내가 계속 빤히 쳐다보니까) 그냥, 그냥요. 편하잖아요.

나: 남자손님은 뭐라고 불러요?

주인장: 안불러요. (꽈당~)

나: 그래도 불러야 할 때 있을 거 아녜요.

주인장: 그럴 때는 그냥, 손님 하거나, 사장님 하거나....

나: 남자든 여자든 다 손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낫지 않아요?

주인장: 네? 그냥, 뭐, 좀 어색하잖아요.


손님을 ‘손님’이라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도 아니고. 거 참 희한한 시츄에이션이다.
‘손님을 가족같이’ 대해야 한다는 서비스 정신이 너무 투철한 걸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여자 손님’만 가족처럼 모시는 거지?

상품과 서비스를 팔고 싶어 안달이 난 판매자들 앞에서 모든 여성은 ‘어머님’이거나 ‘누님’이거나 ‘이모님’이다. 추적은 안해봤지만 ‘아줌마’ ‘아가씨’ 호칭에 비하하는 듯한 뉘앙스가 강하다보니 아마 그렇게 은근슬쩍 바뀌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아줌마'나 '아가씨'가 '어머님'이거나 ‘누님’이거나 ‘이모님’이 되어도 기분 나쁘긴 마찬가지다. ‘어머님’이거나 ‘누님’이거나 ‘이모님’은 늘 어떤 관계 속에서 누군가의 타자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손님’과도, 권력과 지위를 상징하는 ‘사장님’과도 다르다.

‘당신’이라는 호칭에 대해서도 쓴 적 이 있지만 나는 ‘어머님’등등 사적인 관계망에 속한 사람들끼리 부르도록 약속된 호칭을 낯선 이들이 부르며 느닷없이 내 영역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이 몹시 싫다. 사람들 사이의 적당한 거리에 대한 존중은 차이에 대한 존중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제발 남자든 여자든 늙었든 젊었든 돈이 많든 적든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손님'이라고 불러주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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