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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해가 쨍쨍! Sunny California가 바야흐로 시작되다. 두꺼운 재킷을 벗어던졌다.

덴마크 민속마을인 솔뱅 Solvang. 저 풍차 집은 기념품 가게다. 이 도시는 인공적 느낌이 강해 한번 보기엔 예뻐도 두 번 가고 싶진 않다. 유럽에 가보지 못한 미국 노인들의 관광지 같은 곳. 덴마크 풍 앞치마와 두건을 걸친 가게 점원들 표정은 자신들도 잘 모르는 이국적 이미지를 온 몸으로 전시하는 일에 지치고 신물이 난 듯 했다.

계속 남쪽으로 달려 도착한 산타 바바라 Santa Barbara 는 스페인, 멕시코의 숨결이 뒤섞인 예쁜 해안도시다. 깨끗하고 보기좋은 올드 타운에 걸인만 가득해 좀 거시기했지만.

산타 바바라의 미션 mission 이 멋지다는 말만 듣고 무턱대고 언덕에 올랐다. 결론은 미국에서 가본 성당 중 가장 아름다운 곳, 9일간의 여행을 통틀어 부모님이 가장 흡족해하신 곳이었다.

미션은 포교원이라고 해야 할지, 수도원 아니면 수도사 양성소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스페인에서 건너온 프란체스칸 수도사들이 세운 기관이다. 교육기관과 널따란 마당, 성당, 묘지가 함께 붙어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캘리포니아를 점령한 스페인이 원주민 인디언들을 개종시키려던 지배의 도구였지만, 지금의 미션은 인디언과 스페인, 그후 이곳을 점령한 멕시코, 그리고 미국의 문화가 뒤섞여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모두를 포용하는 듯 묘한 분위기가 배어 있다.
캘리포니아 해안을 따라 북쪽의 소노마에서 남쪽의 샌디에고까지 21개 미션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 미션들을 죽 잇는 101 도로엔 el camino real이라는 표지와 함께 미션을 잇는 길임을 알리는 왼쪽 모양의 등이 군데군데 서 있다. 각 미션들은 대체로 말 타고 하루쯤 걸리는 정도의 거리에 배치돼 있다고 한다. '순례'의 이미지에 이유없이 깜빡 죽는 나로서는, 21개 미션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순식간에 캘리포니아가 신성한 비밀을 간직한 땅처럼, 이전과 달리 보였다.  


미션 안 성당의 제대는 한 단 높고 오래된 저택의 거실에나 놓임직한 가구들로 장식돼 있어서 연극무대같은 느낌을 준다. 예수의 사도가 저벅저벅 걸어나와 경건한 성찬의 전례를 금방이라도 공연할 듯한 분위기.
제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부모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무엇을 염원하실지는 묻지 않아도 잘 안다. 늘 같은 기도.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렇듯, 자신들을 위한 바람은 전혀 없이 오로지 자식들에게로만 향할 간절한 희구... 수십년간 반복되었을 그 무수한 기도의 힘으로 내가 살아왔으리라.

성당 안 측면의 오목한 곳엔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의 무덤에서 돌이 치워지고 부활한 예수를 발견하는 장면을 묘사한 조각상이 서 있다.
막내 동생과 나는 무슨 예수를 이렇게 섹시하게 조각해놓았냐며 킬킬거렸다. 착 가라앉은 낮은 파스텔톤의 성당 분위기와도 맞지 않게 튀는 조각상이다.
부활한 예수는 근육질의 우람한 사내 모습이다. 비슷한 이미지를 영화에서도 본 적이 있다. 멜 깁슨이 만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무덤에서 일어나는 예수의 근육질 허벅지는 꼭 터미네이터 같았다. 부활의 해석 중엔 '기쁜 소식' 대신 강한 예수를 통한 '가차없는 심판'도 포함돼 있는 모양이다. 별로 마음에 들진 않는다.

로스앤젤레스는 몇 년 전 샅샅이 훑은 덕택에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으므로 하루 잠만 자고 샌디에고 San Diego 로 내려갔다.
이번 여행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도시는 샌디에고다. 지중해성 날씨는 LA처럼 좋고, 도시는 LA보다 훨씬 예쁘고 깊다.
올드 타운의 집. 샌디에고 올드 타운은 미국 서부에 도착한 유럽인들의 첫 정착지다. 캘리포니아에서 유럽인들이 만든 가장 오래된 마을. 한국의 민속촌처럼 보존되어 있는데, 그다지 요란하게 꾸며놓지 않아 마음에 든다.

올드 타운 앞의 벼룩시장.
발보아 공원 등등 시내를 둘러본 뒤, 저녁엔 올드 타운에서 주워온 '샌디에고에서 꼭 해야 할 일 101가지' 책자에서 추천한 멕시칸 음식점을 찾아가 저녁을 먹었다. 원래 토르티야 공장이었다던 El Indio 식당. 허름하지만 별미다. 저녁 식사 후 가스등거리 Gaslamp Quarter 에 가서 산보. 위의 사진엔 분위기가 잘 살지 않았지만, 야경이 꽤 멋진 거리다.

우리가 묵었던 미션 베이의 호텔 앞 해변. 막내동생이 호텔스닷컴을 뒤져 찾아낸 싼 호텔이었는데, 가격대비 만족도가 아주 높았다. 명당자리에 호텔 구조도 좋다.

다음날은 샌디에고 미션이라 불리는 샌 루이스 레이 San Luis Ley의 미션에 들르다. 산타 바바라 미션이 ‘미션의 여왕’이라고 불린다면 이곳은 ’미션의 왕‘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해 그렇다고. 하지만 새로 지은 티가 역력해 산타 바바라의 미션보다는 감흥이 덜 하다.
미션 앞 회랑만 봐도 그렇다.

산타 바바라 미션의 회랑(위)은 고색창연한 맛이 살아있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조용조용 걸었을 수도사의 발걸음 같은 게 공간에 배어 있다. 반면 샌디에고 미션의 회랑엔 그런 게 없다. 남국의 분위기는 나지만 수도사보다는 원색의 티셔츠를 입은 관광객의 배경으로 더 어울리는 공간이다.

샌디에고를 끝으로 9일 간의 여행이 끝났다. 돌아가야 할 시간.
고통 중에 있는 부모님을 위로하기 위해 기획한 여행이었지만, 끝날 무렵엔 위로는커녕 고단함과 걱정 보따리만 어깨에 더 얹어놓은 것 같아 영 마음이 무거웠다.
늘 그렇듯 이번 여행도 내 안의 다른 얼굴들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스스로에게조차 낯선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은 때로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인생에 밀착해 살아가려면 당혹스러운 맨얼굴도 감당해야 하리라. 어떠한 환상도 없이...

여행 마지막 날, 샌디에고 미션 베이의 해변에서 말없이 석양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이셨다. "모든 게 다 잘 될거야. 모든 게....."
마치 난생 처음 발설하는 비밀이라도 되는 양. 번번이 사랑을 잃고도 또다시 사랑의 맹세에 모든 걸 거는 맹목의 연인처럼. 아픔을 돌이킬 순 없지만 하늘의 수호천사로부터 약간의 보상을 약속받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 단호함에 전염돼 나도 모르게 크게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주 먼 훗날 이 여행을 다 잊어 기억조차 못하게 되더라도, 샌디에고 미션 베이의 해변에서 어머니의 얼굴 위에 떠올랐던, 희망의 그 간절한 표정만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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