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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구경

페루(1)-리마의 해변

sanna 2008. 3. 16. 00:52

지구 반대편인 페루를 향해 갈 때 나도 모르게 떠올랐던 이미지는 ‘세상의 끝’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용보다 제목이 더 유명한 로맹 가리의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때문이다.

고단한 비행을 끝낸 새들이 돌아와 죽는 곳. 새들 뿐 아니라 실패한 혁명가인 주인공도 ‘지상에서의 임무’를 마친 뒤 세상을 등지고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는' 페루 리마 북쪽의 해변에 깃든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페루 해변이 세상의 끝이라는 걸까. 소설을 읽어도 모르겠다. 서양인이 덧씌운 환상의 너울 같아 약간 마뜩찮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여행지에 대한 환상의 힘은 컸다. 페루의 해변엔 뭔가 비장한 로맨틱함이 있을 것 같은 일말의 설렘이 사라지지 않았다. 리마에 밤늦게 도착해 다음날 해변으로 가면서는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사장의 띠, 무한일 것만 같은 광막한 바다조차 계속 와 부딪혀 몰락하는 해변을 상상했다.

하지만 웬걸, 땅이 수면 위로 불쑥 솟은 리마의 해변은 세상의 끝이라기엔 위풍당당해보인다.
솟아오른 땅 위에 건설된 빌딩들은 '끝'보다는 '시작'의 기운을 풍겼다. 하늘엔 죽으러 온 새떼 대신 패러글라이딩을 탄 '인간 새'들이 떠다녔다. 바다 위엔 좋은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들이 고개를 높이 쳐들고 엎드려 파도를 타고 있었다. 
평화롭고 느긋한 해변. 하긴, 대표적 신시가지인 미라플로레스 지구의 해변에서 세상 끝의 이미지를 볼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지..   

가까이서 본 해안절벽. 리마는 해안단구 위의 사막지대에 들어선 도시다.
퇴적층이 아슬아슬해보여도 연간 강수량이 70mm미만이어서 모양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한다.

절벽 위엔 해변을 따라 예쁜 공원들이 많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구엘 공원을 흉내내 만든 듯한 연인들의 공원. 한 가운데 거대한 키스 조각상이 떡 하니 들어서 있다. 왠지 모르게 '역시 남미'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조각.
그런데 이 공원 바로 옆엔 투신자살을 너무 많이 해 '자살다리'라고 불리는 다리가 있다. 자살이 계속되는 바람에 다리 난간에 저렇게 보호막을 씌워놓았다는데. 사실인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여간 '사랑 공원' 옆에 '자살 다리'라... 각각 어떤 절정이라는 점에서 그럭저럭 어울려보이기도 한다. 

나스카의 지상화 연구에 평생을 바친 독일 수학자의 이름을 본따 만든 마리아 라이헤 공원. 나스카 지상화 모양을 그대로 축소해 잔디밭 위에 도형을 그려놓았다. 이 모양은 콘돌 지상화를 축소한 것. 사진에선 작아 보이지만 축소 도형도 꽤 큰편이다. 옆 담장 위에 올라가 줌으로 당겨 찍었다. 이번 여행에선 나스카를 갈 수 없어 지상화는 이걸로 대신하는 수밖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때문인지, 계속 새들만 눈에 띈다. -.-;
지상화에서도 콘돌만 보인다던가...해변엔 라르코마르 Larco Mar 라는 꽤 큰 쇼핑몰 같은 곳이 있는데, 그 앞의 한 가게 위에서도 새를 길들이는 청년이 눈에 띄었다.

여긴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인간 새'들.
패러글라이딩을 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도 찾기 어려울 것같다. 뛰어내리기 위해 짐을 짊어지고 산 위에 올라갈 필요도 없다. 해안 절벽 위에서 그냥 가볍게 뛰어 발만 떼면 바로 바다 위이므로.

남들이 하는 패러글라이딩을 넋놓고 구경하다가 너무 해보고 싶어 그냥 한번 질러보기로 했다. (음...시간 대비 가격을 따지면 쫌 비싸다. 하지만 한번 해보니 돈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교관 앞에 의자를 하나 더 달고 함께 비행하는 방식. 우산에 가려 안보이지만, 중앙에서 막 출발하는 팀의 앞쪽에 매달려 있는 게 나다.

새떼들이 몰려와 죽었다는 페루의 해변에서 새가 되어 날아오르다.
패러글라이딩은 예상외로 편안했다. 의자에 푹 파묻혀 앉아 하늘을 관조하는 듯한 느낌. 새의 눈높이에서 내려다본 바다와 도시는 소음이 지워져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다.
한참 하늘을 나는데 내 눈앞으로 검은 새 한마리가 스쳐 지나갔다. 괜히 반가워 소리쳐 부를 뻔 했다. 이봐, 나도 날고 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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