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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들짐승이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을 본 적이 없다.
 
나뭇가지에서 얼어붙어 떨어지는 작은 새도 스스로를 동정하진 않는다.”
 
-       D.H. 로렌스 -

꽤 알려진 작가가 최근 펴낸 여행에세이를 겨우 다 읽다. 글쓰기 생각쓰기를 쓴 윌리엄 진서는 여행기가 어려운 것은 프로든 아마추어든 작가들이 대부분 이 분야에서 자신의 최악의 작품을, 나아가 한마디로 끔찍한 작품을 써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에세이를 읽고 그 말에 공감했다. (이렇게 안 좋게 봐서 차마 책 제목을 쓰진 못하겠다.) 더불어 나도 여행에세이 나부랭이를 출판한 전력이 있는 터라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내 책도 남들이 읽으면 이렇게 진부하겠지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워쩔……

위에 적은 시는 에세이에 인용된 문구다. 저런 시를 인용하고도 정작 글엔 자기연민이 넘쳐난다. 작가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상투적 여행에세이라 생각하면 그만인데 영 못마땅한 이유가 그런 점 때문이다. 글의 앞부분에서 나는 아픈 아이였다운운을 읽는 순간, 초반에 가졌던 호감이 뚝 떨어졌다.

내 안의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찾아 돌보기.’ 심리학 대중화의 폐해를 하나만 들라면 나는 이것을 꼽겠다. 두려움이나 불안, 반복되는 실수의 근원을 내면의 아이에서 찾으려 드는 성인들이 넘쳐난다. 성인의 마음 안에 어린아이가 왜 없겠나. 하지만 현재 직면한 문제의 근원을 억압된 의식, 그 의식이 생겨난 유년 시절에서 찾으려 들면 늘 징징대는 자아도취적 아이밖에 만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게다가 무엇보다 의심스러운 건,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과연 정확한지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예전에 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보겠다고 버티다 못해 심리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상담가가 어린 시절의 상처를 떠올려보라기에 애써서 몇 가지 이야기들을 생각해냈다. 눈물 콧물 흘려가며 적어간 기억을 상담가와 함께 이야기하며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이런저런 해석과 진단을 받았다. 얼마 후 엄마와 이야기하다 내 딴엔 어렵게 말을 꺼내어 그때 왜 그랬어?”하고 물었더니 웬걸, 엄마가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셨다. 황당한 마음으로 퍼즐 맞추듯 기억을 대조해보았는데 결론은 내 기억이 심하게 왜곡되었다는 거였다.

일례로 나는 고집이 너무 센 죄로 무서운 유치원 수녀님께 끌려가 1주일간 수녀원에서 감금 당해 살면서 새벽에 일어나 마룻바닥 걸레질을 하던 기억이 촉감까지 생생하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미쳤다고 너를 1주일간 수녀원에 보내냐고 펄펄 뛰셨다. 엄마 기억으론 내 발로 좋다고 수녀님을 쫄래쫄래 따라가 수녀원에서 놀겠다고 우겨서 꼴랑 한 시간인가 과자 얻어 먹고 잘 놀다 왔다는 거다. 정황상 엄마의 기억이 더 이치에 맞다. 그럼 도대체 마룻바닥과 젖은 걸레의 촉감, 세모난 유리창에 비치던 아침 햇살의 생생한 느낌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추측할 수 있는 한 가지 단서는 그때 내가 맨날 소공녀같은 그림책을 읽으며 울고 짜고 했다는 점뿐이다.

유년 시절의 다른 기억에 대해서도 엄마랑 합동 분석 결과 내가 현실과 환상을 마구 뒤섞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나는 내 기억을 신뢰하지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이 나처럼 기억력이 나쁘진 않겠지만, 많은 기억의 맥락과 느낌은 현재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따라 계속 달라지고 윤색되기 마련 아닐까.

기억은 바뀐다. 기억력이 카메라처럼 정확하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어떤 대상을 기억하는 자신의 태도는 끊임없이 바뀐다는 건 인정할 것이다. 마르께스의 말마따나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상처받은 성인은 과거의 기억에서 늘 상처받은 아이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돌보고 직면해야 할 대상은 징징대는 내면의 아이가 아니라 현재 문제가 발생한 관계 속에 놓인 성인으로서의 자기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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