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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염쟁이 유씨

sanna 2006. 9. 23. 16:27

대학로 두레홀.  청주에서 상경한 연극인 유순웅씨의 모노드라마 <염쟁이 유씨>를 보다.

워낙 인기가 좋아 연장공연을 거듭하다 보니 7개월째 공연 중이라고 한다.

금요일 밤. 작은 극장 안. 사람이 꽉 차고도 모자라 그 좁은 계단마다 한 명씩 들어앉았다.

유순웅씨의 얼굴은 참 순박하게 생겼다. 영화 <왕의 남자>에 나온 유해진과 너무 닮았다. 울 회사 선배 중에 한 사람과도 아주 많이 닮은 탓에 초반엔 집중이 어려워 혼났다.


그는 이 모노드라마를 2년간 전국을 돌면서 공연했는데 서울에서만 못했다고 한다. 에라, 적자를 보더라도 해보자 마음 먹고 상경했는데 웬걸, 서울연극제 인기상을 타면서 시쳇말로 ‘떴다’.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재미있고 볼만한 연극. (두레홀 공연기간은 10월21일까지인가 그렇다)

평생 시체의 염을 해온 염쟁이 유씨가 생애 마지막 염을 하는 날의 이야기다. 유씨는 몇 해 전 자신을 취재하러 온 기자에게 연락해 모든 절차를 설명해가면서 염을 한다. 그 와중에 조폭귀신, 장의대행업자 장사치,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 등 여러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혼자서 1인 다역을 해가며 1시간20분을 이끌어가기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절반쯤 넘어가니 유씨의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렸다.


이 연극은 모노드라마이지만, 모노드라마가 아니다. 유씨는 배우들을 즉석에서 조달해 관객들이 계속 기자가 되었다가, 상갓집 상주의 큰 아들이 되었다가 막내딸이 되었다가 한다.


내가 보기에 이 연극의 최대 강점은 유씨의 연기력(물론 연기력도 훌륭하지만)보다 그 같은 관객과 배우의 관계에 있는 것 같다.

유씨가 관객을 들었다놓았다 하면서 데리고 노는 재주는 일품이다. 마당극을 오래 한 배우의 관록이 느껴진다. 반면 모노드라마 <벽속의 요정>을 했던 김성녀처럼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약하다. 발성이나 목소리도 별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계속 자신이 연기하는 허구의 세계에 끌어들였다가 다시 현실의 위치로 돌려놓았다가 하면서 데리고 노는 탁월한 재주가 다른 모든 것들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후반부에 가면 그 재주가 절정에 이른다. 유씨의 지휘에 이끌려 함께 신나게 놀았던 관객들, 이번엔 그의 슬픔에 이끌려 동참하게 된다. 유씨가 이끄는 대로 똑 같은 역할 놀이를 하면서도 유씨의 슬픔이 서서히 드러나는 대목에서는 더 이상 웃거나 농담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유씨가 강하게 권유하지 않았는데도 관객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자발적으로 염쟁이 유씨가 차려놓은 빈소에 절하고 유씨를 위로하게 된다. 돈을 내고 공연을 보면서도, 끝나면서 갖는 느낌은 풍진 세월을 살아온 한 노인의 생애에서 가장 슬프고 고독한 일을 함께 했다는 연민 같은 것…

(그게 무엇인지 여기 쓰면 스포일러가 될테니 쓸 순 없고, 꼭 보시라. 울지 않을 수 없다....)

염쟁이 유씨가 뒷부분에서 “잘 죽기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쓴 책 <몰입의 경영>에서 한 대목이 떠올랐다.

삶이란 선택의 연속인데,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헷갈린다면 죽음을 상담자로 삼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내가 죽을 때 지금 이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까? 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보라는 권유다.


## 중간에 돈독이 오른 장례대행업자(물론 유씨다)가 나와 관객들에게 명함을 돌렸다.
나도 명함 달라고 손을 내밀었는데 안주고 바로 옆사람에게 준다. 내민 손이 좀 민망해 속으로 칫~,그랬다. 옆자리 앉은 사람 명함을 보니 홈페이지 주소가 www.golroga.co.kr로 적혀 있다. ^^
이 장사치씨가 들어간뒤 염쟁이 유씨가 나왔다. "장사치, 그 놈이 왔다갔다고?"하더니 "혹시 명함같은 거 돌리지 않았어?"하고 묻는다. 그러더니 유씨 왈.
"아, 그 놈이 명 짧아보이는 사람들만 골라서 명함을 줬단 말여~. 그런 나쁜 놈!" ㅎㅎㅎ


## 중간에 유씨가 염을 하느라 힘이 드니 소주를 한잔 해야 되겠다면서 관객 몇 사람에게 잔을 돌렸다. 앞에서 두번째 줄에 앉은 나도 당첨! 물이겠거니 하고 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물에 약간 희석시켜 농도가 줄어들긴 했지만 진짜 소주다. 내가 엉겁결에 “크아~ 이거 진짜야!” 하고 내지르니, 유씨가 날 째려보며 “거 참, 그럼 가짠 줄 알았어?” 한마디 했다. ^^

## 공연이 끝나고 나올때 유씨가 극장 입구에 서서 나가는 관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때 그의 표정이란!....꼭 '지는 나름대루 열심히 헌다고 혔는디...여러분들 맘에 들었음 좋겄는디, 걱정이네유~'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유순웅씨가 훌륭한 배우일 뿐만 아니라 사람도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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