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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비춘 조명은 종이로 몇 개 가려놓은 천장의 형광등 정도. 문을 닫아도 바깥 먹자골목의 소음은 계속 스며들었다. …이런 곳에서 연극 공연이 제대로 될까. 하지만 연극이 시작되면서 우려는 사라졌다.


주말인 20, 21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이음아트서점에서는 서점과 연극이 만나는 이색 공연이 열렸다. 극단 '드림플레이'가 헌 책방을 배경으로 한 연극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가 무료 시연회를 이곳에서 열었다.


이 자리는 24일 대학로 ‘혜화동 1번지’ 극장에 오르는 연극의 오프닝인 동시에 이음아트서점으로선 특별한 행사였다. 서점 주인장 한상준 대표의 블로그 를 보니 이달 이음아트의 문을 연지 1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문화의 거리'인 대학로에 서점 하나 없는 건 수치”라며 ‘독립 운동’하듯 문을 연 서점인데, 일단 1년을 버텼으니 대견하다.

내가 찾아간 때는 금요일 밤. 서점 안엔 100여명이 빼곡히 들어앉았다. 간이의자와 책 판매대를 활용해 제법 계단식 객석의 공연장 같은 분위기가 난다.

연극이 주말 저녁 헌책방에서 벌어진 일을 소재로 삼은 덕택에 ‘주말, 서점’이라는 현실의 시공간과도 어울렸다.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는 30대가 된 대학 91학번 세대가 20대의 추억과 현재를 돌아보는 연극이다.
80~90년대 초반 학번은 잘 알테지만, '오늘의 책'은 신촌 대학가에 있었던 사회과학 서점이다. 신촌에서 약속이 있을 때마다 단골로 들렀던 서점이 '오늘의 책'과 그 맞은 편 '알 (아래아 자를 쓴/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다)'이었다.
연극에선 20대 초반 함께 학생운동을 하다가 이제는 영화감독, 신문기자, 소설가가 된 동창들이 새로 연 친구의 서점에 모여든다.
연극 초반엔, 등장인물들이 계속 '넌 왜 그랬니'와 '넌 왜 그따위로 사니' 같은 투로 주고받는 대화가 좀 짜증스러웠다.
과거는 순수했으며 등장인물들이 타협한 현재는 늘 속물스럽고,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경우) 과거를 죄책감 없이 떠올리기 어렵다는 식의, 너무나 상투적인 후일담 연극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시 끝까지 봐야 한다. ^^
과거와 도덕적 책무, 죄책감 등을 갖고 옥신각던하던 등장인물들의 실랑이는 "네가 아는 게 사실이 아니"라는 친구의 '증언'으로 모두 원인무효가 되고 만다. ('증언'이 뭔지 여기 쓰면 스포일러가 되니, 궁금하신 분은 24일부터 11일초까지 대학로 '혜화동 1번지'를 찾으실 것! ^^). 그 작은 '반전'이 마음에 들었다. 인생의 커다란 비극을 겪더라도 사람들이 추측하듯 '집착'이나 '미련'이 꼭 삶의 동기가 되지는 않는다는, 그냥 살아갈 뿐이라는... 나더러 연극의 부제를 달라면 이렇다. "사람들은 왜 보고싶은 것만 볼까?"

연극은 그렇다치고, 실제 서점에서 연극 공연을 보니 뭔가 다르다. 공연 내용이 책과 관련있어서겠지만 뭐랄까, 헌 책은 곧 사람의 역사임을 실감하게 하는 자리였다.

등장인물이 기형도 시집에 서투른 고백을 써서 선물하며 풋풋한 사랑을 고백했던 일화가 등장할 때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따라 웃다가 내가 막 세상에 눈을 뜰 때 친구들과 주고받던 시집, 표지를 열고 그 안에 짤막한 편지를 쓰던 일들이 떠올라 마음 한 켠이 아릿해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또 주인공 중 한 명이 "그땐 왜 저런 이야기들에 줄을 쳐가면서 읽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 중요했던 것들이 왜 지금은 중요하지 않을까?" 하고 물을 때, 내 머릿속에선 20대 때 내가 결연하게 밑줄을 그었던 문장들이 떠올랐다. 그 문장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문장들을 떠난 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무엇을 읽는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서점에서 열린 이날 공연은 자신이 읽어온 책들을 떠올리며 현재의 모습을 생각하게 만드는 자리였다. 무대 장치의 정교함을 버린 대신 현실적인 공감을 이끌어냈다.


연출을 맡은 김재엽 씨는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공간인 서점을 활용해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1시간 반 동안 그 경계는 실제로 사라진 듯 했다. 내 앞에서 박수를 치며 신나게 연극을 보던 대학생 양윤희(20)씨에게 소감을 물었다. “극장보다 리얼했다. 정말 그런 사연을 가진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걸 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


서점도 때론, 판타지의 공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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