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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를 할 때 피겨스케이팅 선수처럼 솜씨 좋은 혀끝에 대한 찬사로 시작하는 소설 ‘걸프렌즈’ 를 읽으며, 뜬금없이 TV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가 생각났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 마흔 즈음의 여자들은 별 볼 일 없는 남자 하나가 누구 것인지를 두고 목숨 걸고 싸우지만, ‘걸프렌즈’에서 서른 즈음의 여자들은 역시 별 볼 일 없는 남자 하나 사이좋게 공유한다.
마흔 즈음의 여자들에게 남자는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핵심 이슈였는데 서른 즈음의 여자들에게 남자와의 사랑은 인생의 숱한 이슈 중 ‘n분의 1’쯤 되는 일이다.
‘걸프렌즈’를 읽다보면, 넋 놓고 보던 ‘내 남자의 여자’가 한없이 칙칙하게 느껴진다.
올해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작가는 장편소설을 처음 써본 준 재벌가의 며느리, 뭐 그런 프로필에 호기심이 일어 이 소설을 읽었다.
걸프렌‘즈’라는 제목이 노골적으로 말해주듯 한 남자를 공유한 여자들의 이야기다. 새로 사귀기 시작한 남자친구가 알고 보니 ‘양다리’도 아니고 ‘세 다리’였는데 이 세 명의 여성들은 서로 머리채 붙들고 싸우기는커녕 남자를 사이좋게 공유한다. 논리는 간단하다. “어떤 잣대에 맞지 않으면 상대를 교체하는데, 상대를 교체하기가 어렵다면 방식을 교체하는 것”이 뭐 어떠냐는 식.
쉽게 쓱쓱 읽히는 소설이다. 기대에 미치진 못했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게 약간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뭘 높이 산 거지? 문체와 사고의 발랄함은 정이현만 못하고, 주제의 도발성으로 따지자면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만 못하다.
그 또래 여성작가들의 소설이 대체로 그렇듯 트렌디한 세대 보고서 같기도 하다. 그녀들은 맥도날드에 들락거리며 자랐고 버거킹, KFC, 피자헛을 옮겨 다니다 그곳들이 시시해지기 시작하면서 어른이 되었다. 성년이 된 뒤로는 ‘콩 다방’ ‘별 다방’이 그녀들의 아지트다.
그녀들이 좋아하는 남자의 프로필을 간추려 적자면 이렇다. 잘난 남자는 싫다. 잘난 체 맞춰주느라 진을 빼야 하니까. 특색 없고 평범하며 얼굴과 이력이 보통이어도 좋다. 제일 중요한 건 성격. 배려심 많고 화를 안내며 말 잘 들어주는 여성적인 성격에 성욕이 왕성하며 애무의 스킬이 뛰어나면 금상첨화다. 연애할 때의 금기는 가족 이야기를 삼가고 함께 찍은 사진을 싸이월드에 올리지 않으며 과분한 선물하지 않고 사생활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이 또래는 이렇구나, 하고 무심하게 휙휙 책장을 넘기다가 생각한다. 글을 그다지 잘 쓴 것도 아니고 공유하는 사랑도 이미 몇 번 변주된 터라 신선한 주제도 아닌데, 이 소설, 묘하게 정감 가는 구석은 있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 ‘별 다방이나 콩 다방에서 보낼 수 없는 시간들이 있다. 어떤 시련이나 슬픔을 공유하기에 그곳들의 의자는 너무 딱딱하다.’
뭐랄까. 동화의 세계 밖으로 걸어 나와 누추한 인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여동생을 보듯 안쓰러운 기분. 뭐든 절실한 게 없어 쉽게 놔버리며 노력하지 않고 뜻하는 것을 얻기만을 바라던 주인공은 소설 후반부에 들어서면 앞날을 전혀 알 수 없는 일에 자신을 쏟아 붓는 경험을 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가장 못하는 것을 하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난다. 그래야 할 때도 있는 거다. 한번쯤은 절실해져야 정말 어른이 될 수 있지 싶다.
말이 되느냐 아니냐 와는 별개로 이 소설에선 기묘한 자매애가 가장 두드러진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는 일부일처제에 대한 문제제기, 사랑을 공유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가장 선명하게 부각되는 주제였지만, ‘걸프렌즈’에서 사랑의 공유는 소재일 뿐, 실제로는 남자는 정말로 별 것도 아닌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의 여자들”이 아니라 “남자에 대한 취향을 공유한 나의 여자친구들”의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내 남자의 여자’에서도 점점 남자는 뒷전이고 여자들의 문제로 이야기가 집중된다. 난 그 드라마를 보며,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은 친구도 여전히 친구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더 눈길이 간다.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요즘 여자들에겐 정말 남자가 별 것도 아닌 게 맞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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