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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하나 말해주지. 너의 신전에선 가르쳐주지 않는 비밀을 말이야. 신은 인간을 질투해. 왜냐면 인간은 죽거든. 인간은 죽을 운명이라서 모든게 아름다운 거야.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다워.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스가 브리세이스에게-

‘트로이’(DVD·워너 브러더스)에서 꽤나 의미심장한 이 대사는 사실 아킬레스의 ‘작업’용 멘트다.
트로이를 침공해 아폴론 신전에서 잡아온 여사제 브리세이스에게 반한 아킬레스는 공포와 분노로 정신을 못 차리던 그녀를 달래며 ‘순간의 아름다움’을 속삭인다. 두 사람의 눈에 전류가 통하는 것도 이 시점부터다.

‘작업’용이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아킬레스가 ‘지금 이 순간’을 찬양하다니.
이 영화에서 아킬레스가 누구던가. 더 이상 적수가 없어 전투조차 따분한 불세출의 전사다.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덩크슛을 하듯 적의 목에 칼을 내리꽂는 그의 동작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답지만, 이 완벽한 제압의 순간에조차 그의 얼굴엔 ‘아∼, 귀찮아’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실려 있다.
트로이를 욕심내는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대놓고 경멸하면서도 그가 전쟁터에 나갔던 이유는 오직 하나, 불멸에 대한 유혹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하면서 살라고 속삭인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로 불멸을 꿈꾸며 신의 영역을 넘보았던 아킬레스의 눈엔 ‘죽을 운명이라서 아름다운 이 순간’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이 어리석어 보였던 것일까.

하긴,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거의 모든 종교에서 ‘지금’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는 ‘지금이 바로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라고 적혀 있다. 베트남 출신의 선사 틱낫한은 ‘접시를 닦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깨끗한 접시를 얻기 위해 접시를 닦는 것이고, 둘째는 그냥 접시를 닦기 위해 접시를 닦는 것인데, 두 번째 길만이 정신 수양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흔히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행하는 명상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일들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숫자를 세며 하는 명상을 10분간만 해봐도 알 수 있다. 일어나지 않은 일,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사소한 걱정들은 뒤엉킨 채로 의식의 지평선 위에 사라질 줄 모르는 기상전선처럼 걸려있다.
몸은 ‘지금, 여기’에 속해 있으나 불안한 마음은 늘 ‘다른 때, 다른 곳’을 기웃거린다….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만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건이 또 있을까. 정글과도 같은 진화의 역사에서 살아남아 후손들의 성격을 형성해준 조상들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근심하며 살았던 집단이었다. 이들보다 집중력이 강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던 시간과 장소에 몰입하는 바람에, 눈에 보이지 않던 독사에게 물리고 들소의 뿔에 받혀 요절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대신 과거에 대한 회한과 미래에 대한 불안 혹은 설렘이 절절하게 느껴진다면, 마음껏 후회하고 불안해하자. 다가올 앞날엔 또 얼마나 많은 들소들이 보이지 않은 수풀더미 속에 잠복해있을 것인가. 살아남기 위하여 불안에 떠는 모든 이들에게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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