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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지금 만났더라도 친구가 됐을까?”
- 영화 <돈많은 친구들>에서 프래니가 올리비아에 대해 말하며 -
얼마 전 종종 모임을 갖는 여자친구들 6명과 함께 작심하고 레지던스 한 칸을 빌려 ‘도심 MT’를 간 적이 있다.
미국에서 직장을 갖게 돼 먼 길을 떠나는 친구를 환송하는 자리였다. 모두 6명 중 3명은 싱글, 3명은 아줌마다. 아줌마들은 아이들을 다 남편에게 맡겨놓고 들뜬 기분으로 모임에 왔다.
이런 기회를 갖게 된 데 대해 모두 행복해하면서, 함께 밥 해먹고 술 마시고 그동안 참았던 수다를 마구 떨면서 놀았다. 그렇게 밤을 샐 줄 알았다. 그런데...
아침에 스코어를 확인해보니, 싱글 3명은 모두 새벽 2시 안팎에 나가 떨어졌고, 아줌마 3명이서 새벽 5시까지인가 수다를 떨고 먼저 가야 하는 친구 배웅까지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아줌마의 위대한 체력!~
내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들이다. 대학 시절을 비슷한 ‘짓거리’를 하며 함께 보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아는 부분이 많은, 소중한 친구들.
그런데 그날은 뭔가가 못내 아쉬웠다. 뭔가 1%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그게 뭐였을까...내내 마음 한구석에 걸렸는데, 영화 <돈많은 친구들>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주제가 이제 서로 달랐던 것이다.
그날 새벽 5시까지 수다를 떨었던 아줌마 친구들의 주제는 단연 ‘아이 잘 키우기’였다. 아이가 없는 싱글인 친구들은 그 대화에 ‘아, 그래?’ ‘나도 들었는데 ~한다더라’하는 맞장구이상으로는 잘 끼어들지 못했다.
새벽 5시까지 아줌마 친구들은 아이 키우는 문제를 절박하고도 진지한 심정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싱글인 친구들이 아이 키우는 이야기에 맞장구나 치는 소극적 자세로 깨어있기엔 그 밤은 너무 길었다.
싱글인 친구들이 모두 결혼을 해 자녀를 갖지 않는 한, 앞으로도 10여년은 쭈욱 그럴 것이다. 서로의 근황을 물은 다음, 가장 절박한 관심사인 아이 키우기로 대화의 주제가 집중되어 버리는....
불평할 일도, 안타까워 할 일도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이를 먹었구나, 하고 새삼 생각할 뿐...
20대 초반엔 살아가는 일에 대해,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이성에 대해, 그 다음은 직장에 대해, 지금은 자녀에 대해, 나중에 자녀들이 모두 다 커버리면 다시 자기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시기가 돌아오려나.....
하긴 관심사가 이렇게 옮겨가지 않는 관계, 20대 때의 마음 그대로인 우정이라는 것도 좀 이상하다. 맨날 만나서 20대 때마냥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관계란 또 얼마나 버거운가.
<돈많은 친구들>을 보며 때로 웃었고, 때로 불편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마흔을 조금 넘긴 네 여자친구다. 네 명 중 세 명은 모두 결혼했고 각각 부자 남편을 둔 전업주부,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 시나리오 작가다. 전직 교사인 올리비아 (제니퍼 애니스턴)만 싱글. 돈많은 학생들이 주는 모욕을 참을 수 없어 직장을 때려친 올리비아는 가정부로 일하며 한때 사귄 유부남에게 전화질이나 하는 한심한 인생이다.
부자친구들이라고 해서 인생이 만만하지는 않다. 친구들에겐 모두들 각자 짊어진 자기 몫의 고통이 있다. 어느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그러나 영화를 보며 나는 각자 자기 몫의 문제를 안고 낑낑대는 친구들의 인생보다 이들의 '관계'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파출부 올리비아는 도대체 돈많은 친구들의 모임에 왜 나갈까. 내 눈엔 그게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동창회를 해도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자의식이 강한 친구들은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다.
올리비아와 친구들은, 한 사람은 파출부, 다른 사람들은 각자 파출부를 고용하는 집 주인들일지언정, 성공과 실패의 잣대로 서로를 재지 않는 ‘진정한’ 친구들이어서 계속 만날 수 있는 걸까.
올리비아는 그럴지 몰라도, 친구들은 아니다.
함께 있을 때 듣기 좋은 말들을 골라 하려 애쓰던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제인의 남편이 게이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엉망진창으로 사는 올리비아를 염려한다. 염려의 말투에 표정은 진지하지만, 올리비아의 불행은 친구들이 자신의 삶이 얼마나 안전하고 다행스러운 것인지를 확인하는 위안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영화를 보다가 별 수 없이 내 친구들을 생각하게 된다.
부잣집 마나님인 프래니가 파출부로 일하는 친구 올리비아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가 지금 만났더라도 친구가 되었을까”하고 말할 때,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내 오래된 친구들의 얼굴이 주루룩 떠올랐다. 지금 만났더라면, 나는, 그리고 내 친구들은 서로를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정에 끼어드는 건 영화에서처럼, 돈만이 아니다. 앞서 싱글과 아줌마가 갖는 관심사의 차이처럼, 처지와 환경의 차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 취향의 차이....그 모든 것들이 우정을 변하게 만든다.
어찌보면 20대 때 모든 걸 공유한다고 생각했던, '네가 곧 나'같았던 우정 그 자체가 판타지일지도 모르겠다. 두번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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