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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를 해서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라오 (If you make a mistake, if you get all tangled up, you just tango on)”

-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프랭크가 도나에게 -

몸을 움직여 리듬을 타는 모든 일엔 스텝이 있다. 하다못해 달리기에도 스텝이 있다.
피트니스센터의 트레드 밀에서 뛰는 사람들의 스텝을 보면 대충 ‘달리기 이력’을 짐작할 수 있다. 쿵쾅쿵쾅 요란하게 뛰는 이는 십중팔구 초보자다. 노련한 주자의 스텝은 체중이나 속도에 관계없이 사뿐사뿐 가볍다.

장거리 달리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 발걸음을 ‘3-2-3-2’ 리듬의 호흡에 맞추려고 애를 쓰다 발이 엉킨 적이 여러 번이었다.
스텝이 엉키면? 잠시 멈춰 서서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그런데 “스텝이 엉키면 그게 탱고”라니?

‘여인의 향기’(DVD·유니버설)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프랭크(알 파치노)가 아름다운 아가씨 도나와 탱고를 추는 장면은 잊기 어려운 명장면이다.
“(탱고를 추다) 실수할까봐 두렵다”는 도나에게 프랭크는 “탱고는 실수할 게 없다. 실수를 해서 스텝이 엉키면 그게 탱고”라고 대답한다.
영화를 볼 땐 그 말이 여자를 댄스 플로어로 꼬셔내기 위한 ‘작업용 멘트’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탱고 전문가 김근형씨는 “아르헨티나 탱고의 특성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

탱고를 댄스 스포츠와 구별해주는 가장 큰 차이는 즉흥성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유럽 이민자들이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기대와 번민을 담아 만든 춤답게, 탱고는 커플이 스텝을 즉흥적으로 만들어 추는 춤이다. 김씨는 “이런 즉흥성 때문에 탱고에서는 스텝이 엉키고 틀렸다고 해도 그것을 고치지 않고 다음 스텝에서 만회하도록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설명에 그치지 않고 직접 스텝을 보여주었다. 리드를 하는 남자가 온 몸으로 전달하는 신호를 여자가 해석해서 서로 밀고 당기며 진행되는 춤인 탱고의 기본 스텝은 여덟 걸음. 그런데 스텝마다 다른 동작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Exit)’동작이 있다.
예컨대 왈츠에선 기본 여섯 걸음을 무조건 가야하며 그걸 다 못간 채 다른 동작으로 빠지는 것은 비정상이다. 반면 탱고에선 첫 번째 걸음에서 출구를 선택해도 정상이다. 상황에 따라 어디로든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스텝을 가진 춤은 탱고가 유일하다고 한다. 넓은 공간을 휘젓는 볼룸댄스와 달리 탱고는 붐비고 비좁은 공간에서 태어난 춤인 탓이다. 한 걸음 나갔다가 여의치 않으면 어디로든 빠져 나갈 방도를 늘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탱고에는 스텝의 수정이 없다. 틀린 스텝은 되돌릴 수 없으니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며 출구를 찾는다.
첫 번째 스텝이 엉켜 두 번째 스텝으로 나아가지 않고 출구를 선택해도 전혀 문제가 아니며 그게 그것대로 또 다른 춤이 된다. 실수투성이의 스텝을 밟으며 살아온 것 같아 자책하는 사람이라면 기억해둘 만한 멋진 춤이지 않은가?

인생에 대한 탱고의 절묘한 은유는 ‘여인의 향기’ 후반부에 나온다.
실패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프랭크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제 손으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하지만 ‘보호자’인 고교생 찰스(크리스 오도넬)에게 들켜 자살조차 성공하지 못하자, 그는 허탈한 눈빛으로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하고 나지막하게 내뱉는다. 그런 그에게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텝이 엉키면 그게 탱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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