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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시멜로 이야기 번역 문제로 논란이 된 정지영 씨>
    
밀리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의 실제 번역자가 아나운서 정지영 씨인가 아닌가를 두고 한동안 시끌시끌했다. 출판사인 한경BP가 12일 “대리번역이 아니라 이중번역”이라면서 정지영 씨와 독자에게 사과한다고 수습을 시도하고 나서 사태는 일단락되는 느낌이다. 정지영씨도 자신이 진행하는 생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언급했다. 이 정도 선에서 사태를 덮으려는 태도다.

출판사인 한경BP가 얼마나 곤란할지는 짐작이 되지만, 나는 “대리번역이 아니라 이중번역”이라는 해명이 앞뒤가 맞지 않고, 정지영 씨를 더 곤란한 처지에 몰아넣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출판사가 이중번역을 맡기게 될 때는 대개 전문번역자에게 먼저 번역을 맡겼는데 그 뒤 마케팅하기 좋은 ‘스타급’ 이름을 지닌 번역자 섭외가 성사돼 ‘이중’이 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이런 경우 출판사들은 먼저 번역을 맡은 번역자에게 양해를 구한 뒤 계약상의 번역료는 지급하지만 ‘번역 크레딧’은 이름값 높은 번역자 쪽으로 옮겨가고, 그래서 ‘이중번역’이 된다.


그런데 ‘마시멜로 이야기’는 출판사의 설명대로라면 ‘스타 마케팅’을 위해 먼저 정지영 씨에게 번역을 맡긴 뒤, ‘오역과 퀄리티의 문제’를 우려해 전문번역자에게 그 뒤 다시 번역을 의뢰한 것이다. 통상적인 의미의 ‘이중번역’과 사뭇 다른 절차다.

정지영 씨도 본인이 직접 번역을 했고 김 모 씨의 존재 혹은 대리번역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면, 출판사를 고소하겠다고 길길이 뛰어도 시원찮을 판에 저렇게 침묵만 지키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


게다가 ‘실제 번역자’라고 주장하고 나선 김모 씨가 출판사와 맺은 계약서에는 분명히 ‘제3의 인물을 번역자로 표기하는 조건에 동의하며 이 조건에 대한 비밀엄수 의무를 진다’고 적혀 있다. 단순한 이중번역이었다면 출판사가 ‘제3의 인물을 번역자로 표기하는 조건’을 계약서에 적을 리가 없다.

계약만 놓고 본다면 번역의 문제를 폭로한 김 모 씨에게도 문제가 있다. 정지영 씨가 이름만 걸고 실제 번역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함께 자신이 실제 번역을 했다는 도덕적 우월성은 확보했을지 모르지만, 쌍방합의에 의한 계약을 깼다는 점에서 그 역시 계약의 도덕성을 위배한 셈이니 말이다. 그 까닭에 대해서도 소문이 무성하지만 내가 직접 알 수 없는 일이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이번 일을 계기로 대리번역이 세상에 까발려졌지만, 정지영 씨 뿐 아니라 유명한 교수, 기업인 등이 번역자로 되어있는 책의 상당수가 대리번역의 결과인 경우는 너무나도 많다.

대학교수들은 대학원생에게 번역과 감수를 다 맡긴 뒤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작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 씨는 예전에 “조교에게 대신 번역시킨 원고를 출판하는 행위는 대학교수라는 신분과 명성에 의지한 매춘행위”라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번역회사에서 초벌 번역을 하고 책에 번역자로 이름이 오를 사람이 그걸 원자료로 삼아 리뷰하고 고치며 번역을 하는 수순은 너무 보편적이어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이 초벌 번역-번역자의 리뷰 과정에서 무수한 오역이 양산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대리 번역은 그 초벌 번역의 정도를 뛰어넘는 것이다.
꽤 유명한 전문번역자에게 물어봤더니, 그도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 출판사의 의뢰로 대리번역을 두 번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한 출판사는 노골적으로 “당신 번역이 좋아서 전화했다”면서 대리번역을 해달라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 또 한 출판사는 그가 대리번역을 한 책에 이름만 얹을 대학교수와 그를 “서로 알고 지내라”며 인사를 시켜주기도 했다.

더 황당한 경우는 출판사에 이름을 빌려주기로 약속한 어떤 대학교수가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대리번역을 부탁했던 경우다. 그는 “나도 먹고 살아야 해서 대리번역을 몇 번 한 적이 있지만 정말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 제안은 거절했다”고 한다.


이런 풍토, 대리번역 자체가 너무 퍼져 있어서 별로 문제라고 느끼지도 못하는 출판 풍토에서, 정지영 씨는 어쩌면 희생양일는지도 모른다. 출판사나 그나 대리번역이 심각한 도덕성의 문제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위에서 내가 이야기했던 전문번역가는 “출판사 한 곳과 정지영 씨만 들입다 패는 식의 비난은 옳지 않다”고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면, 그리고 정지영 씨 몰래 번역을 이중으로 맡긴 출판사의 해명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출판사에서는 양쪽의 명예회복을 위해 책에 정지영 씨와 대리번역자의 이름을 둘 다 올려 ‘공동 번역’으로 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것도 한 방법일 듯하다.
이미 지저분해져 버린 상황을 '쿨'하게 수습할 수 있는 태도는 될 것이다. 얼마나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출판사 사람들은 번역서 비중이 지금처럼 계속 높고, 번역자에게 정당한 대우를 돌려주기가 좀처럼 쉽지 않고, 유명한 번역자 이름에라도 기대어 판매를 해야 하는 시장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대리번역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들 한다. -.-;

이런 상황이, 우리 사회의 천박한 지적 풍토를 드러내 보여주는 단면이어서 씁쓸하다.
더욱 씁쓸한 건 대리번역을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출판사들보다, 손에 물 안 묻히고 설거지 하려는, 이른바 ‘유명인’들의 자세다.
대학교수니, 기업인이니, 방송인이니 뭐 아무튼 이름 좀 알려지기 시작한 사람들은 번역서 몇 권의 역자, 책 몇 권의 저자가 되면 지적 서열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건가? 좋다. 그런 지적 허영심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럼 왜 그걸 자신의 노동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하느냐 말이다.
유명해지면 그 정도는 남이 도와주는 것이 당연해서 그런 건가? 자신의 이름에 대해 그렇게 무책임해도 될까?
예전에 어떤 성명서에 이름이 올라있는 한 대학교수에게 전화해서 뭘 물어봤더니 "나는 잘 모르고 이름만 빌려준 것"이라는 대답을 들은 적도 있다. 자신의 이름이 어디에 쓰이는지에 대해 그렇게 무신경하고 무책임하다는 것, 명성으로 모든 게 다 용서된다는 듯한 태도가, 놀랍기 그지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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