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원더풀 라이프’를 만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에세이. 하루키의 에세이나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언뜻언뜻 연상시키는 대목들. 독특한 일본풍같은 게 있달까. 목소리 높이지 않고 자분자분한 말투로, 심각해지지 않고 경쾌하면서도 그냥 휙 지나치지는 않는 찬찬한 시선 같은 것.일테면 감독이 ‘사람은 상중에도 창조적일 수 있다’는 어느 책의 구절을 읽으며 떠올렸던 촬영의 경험. 나가노 현의 한 초등학교를 3년에 걸쳐 취재했는데, 한 학급의 아이들이 송아지를 키워 교배를 시키고 젖을 짠다는 목표를 세우고 3학년 때부터 계속 송아지를 돌봐왔더란다. 그러나 5학년 3학기가 시작되기 조금 전, 예정일보다 빨리 어미소가 조산해버렸다. 울면서 송아지의 장례식을 마친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새해 읽은 첫 책은 ‘몸의 일기’, 다음은 ‘마음의 시계’다.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을 모아둔 서가 앞에서 서성이다 ‘몸의 일기’를 고른 건 그야말로 ‘생존체력’을 키우는 게 절실하단 걸 느끼던 때였고, 붕붕 뜨는 정신을 끌어내려 단단히 몸에 결박하고 싶단 생각을 하던 때라서 그랬는지도...자꾸 변하기 마련인 정신을 관찰하는 내면 일기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며, 오직 몸의 상태, 변화만을 관찰하여 기록하겠다는 다짐 하에 쓰여진 일기(를 가장한 소설). 그런데도 한 사람의 일생의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방귀 냄새, 성기 모양까지 자세히 기록한 몽테뉴의 “에쎄”를 떠올리게 하는 세밀한 기록. 한탄과 자기혐오, 느닷없는 반성과 후회 따위로 얼룩진 일기 (조차도 써본지 오래됐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파리의 식당과 공연장에서 동시다발테러가 일어나고 서울 한복판에서 농민의 몸 위에 물대포가 쏟아지던 날 즈음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무차별 총기난사 테러로 미국이 들끓고 있다. ‘어제의 세계’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작가의 자서전이지만, 그가 묘사한 이성의 패배와 야만성의 승리는 그저 ‘어제’의 일로만 읽히지 않았다. 인류가 숱한 문명을 거듭하고 무수한 희생을 치르며 쌓아올린 자유와 공존, 존엄의 가치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음을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목격하고 있으니까. 지금은 전기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전기와 희곡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작가였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브라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
웹툰을 드라마로 옮긴 ‘송곳’의 방영이 끝나는 날마다 소셜미디어에는 노동상담소장으로 나오는 구고신의 명대사를 옮긴 글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온다. 구고신의 명대사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라는 무서운(?!) 제목의 책을 쓴 미국의 노동운동가 사울 알린스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해서 널리 알려졌던 이 운동가도 21세기 한국에 있었다면 구고신처럼 말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대사.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 듣지.” 옳은 말을 하면 사람들이 따를 거라는 기대는 얼마나 순진한가. 누구나 자기 경험에 비추어 세상을 본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당위만 주장할 게 아니라 상대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고 상대의 가치관을 존중하며..
몇 년 전만 해도 해외원조랍시고 개발도상국의 오지에 학교 하나 덜렁 짓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를 지어 취학률은 높아졌으나 교재도 없고 교사도 부족해 학교를 몇 년씩 다닌 아이들이 여전히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황당한 사례도 숱했다. 지금은 많이 발전해서, 건물만 짓고 손 떼는 몇 달짜리 국제개발협력사업은 거의 없다. 교육을 예로 들면 현지에 상주하는 민간단체들이 최소 3년 이상 학교 건물을 고치고 양질의 교육을 위한 교재를 만들며 교사를 길러낸다. 국제개발협력사업에서 민간단체의 역할은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민간단체들은 개발도상국 정부 주도의 개발에서 배제되기 쉬운 빈곤층 아이들과 여성, 소수자에게 가닿고 소외된 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일을 한다. 9월 유엔개발정상회의가 채택한 ‘지속가능개발목표..
돌이켜보면 제자백가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상앙, 이사와 같이 천하 통일을 이끈 사람의 삶도 결국 비극으로 끝납니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룬 것이 많을 수 없습니다. 꼬리를 적신 여우들입니다. 그 실패 때문에 끊임없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자위합니다. 한비자의 졸성 (拙誠)이 그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졸렬하지만 성실한 삶, 그것은 언젠가는 피는 꽃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한 말입니다.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 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훨씬 훗날의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물며 열매는 더 먼 미래의..
# 아래에 올려둔 글은 지난해 5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써온 한겨레신문 칼럼의 마지막 글. 칼럼을 그만 쓰겠다고 자청한 이유는 하는 일이 달라져서다. 이전엔 1개 부서만 맡고 있었는데 8월 마지막 주의 인사발령으로 3개 부서를 총괄하게 됐다. 말이 3개 부서지 일의 양은 몇 십 배가 늘어난 기분…ㅠ 낯선 일의 절차와 세부사항을 익혀야 하는 부담, 당장 9월부터 줄줄이 잡힌 출장 일정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버거웠던 칼럼을 계속 쓸 자신이 없었다. 그저 그런 글들이었지만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좀 시원섭섭하다. 나중에 다시 기회가 온다면 ‘알려야 할 이슈’의 강박에서 벗어나서 좀 자유롭게 써보고 싶은데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고....듣보잡 필자에게 지면을 허락해준 신문사에 감사할 뿐. # 요즘 녹초가 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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