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결정은, 결정을 내리는 어른들보다 나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8년 전 발리 기후변화회의에 참석했던 15살 소녀의 말이다. 어떤 사안이든 아이들과 관련된 일을 다룰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일을 결정한 성인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될 아이들의 의견을 듣는 것임을 잊지 않으려고 책상 옆에 붙여두었다. 재난이 발생할 때 구호단체 역할의 최우선 순위는 긴급한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인데, 내가 일하는 단체가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과제는 재난을 겪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시리아와 남수단의 분쟁 때에도, 태풍 하이옌이 덮친 필리핀, 대지진이 일어난 네팔에서도 우리 스태프들은 쑥대밭이 된 마을을 돌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서를 썼다. 아이들에게 뭐가 필요한지 빤히 짐작할..
사회의 온갖 분야에서 자주 거론되는데 정작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덕목으로 나는 ‘역지사지’를 꼽겠다. 정치권에선 ‘네가 문제’라고 비난할 때에도, 비난을 멈추자고 호소할 때에도 역지사지를 들먹인다. 이른바 ‘갑질’ 논란에서도,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공무원 연금 개혁 논란 때에도, 여성혐오에 남성혐오 패러디로 맞선 인터넷 논란에서도 곧잘 등장하는 단어다. 가치관이나 입장, 이해관계가 팽팽히 대립할 때 사람들은 늘 서로에게 역지사지를 요구한다. 그러나 역지사지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거의 없다. 모두가 주장하지만 누구도 실천하지 않는 이 말이 쓰이는 맥락도 점점 기이해져 간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선 자기반성 없는 가해자가 반격에 나선 피해자에게 역지사지를 요구한다. 급기야 ‘역지..
상대가 나를 사랑하거나 깊이 의지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상태에서 힘을 휘두른다면, 이는 신체적 상해에 더해 상대의 마음을 악랄하게 모욕하는, 질이 나쁜 폭력이다. 다수의 가정폭력이 그렇고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폭로된 데이트 폭력도 그 한 예다.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폭행의 이유로 ‘네가 구타유발자’라며 피해자 탓을 했다. ‘맞는 것보다 그를 잃는 게 더 두려웠다’던 피해자는 맞을 짓을 계속하는 자신을 탓하며 더 좋은 연인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와 매우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폭력의 맥락에서도 들은 적이 있다. 재작년 겨울 세상을 놀라게 했던 아동학대사망사건 이후 민간단체와 국회의원이 함께 만든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사무국장을 맡아 학대로 숨진 아이가 살던 지역에..
5월 31일은 네팔의 아이들에게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다. 두 차례의 대지진으로 수업이 중단됐던 지진영향지역 학교들이 이날 공식적으로 수업을 재개했기 때문이다. 이날이 특별했으리라 짐작하는 이유는 내가 일하는 단체의 후원으로 서울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를 비롯한 15개국 연구자들이 실시한 ‘아동의 삶의 질’ 조사에서 네팔 아이들의 응답을 보고 나서다. 건강, 물질적 만족, 가정환경 등 삶의 질을 구성하는 여러 지표 중 네팔 아이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영역은 학교였다. 이들의 학교에 대한 만족도는 조사에 참여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았다. 조사 시점인 지진 발생 이전에도 네팔의 학교 사정이 열악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활동으로 ‘학교 가기’를 꼽은 답변에선 어떤 간절함까지 느껴진다. ..
이제 한국도 예외가 아닌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대형 참사가 아이들에게 남기는 상처는 길고도 깊다. 네팔 대지진 긴급구호 대응을 거들던 와중에 타산지석이 될까 하여 내가 일하는 단체가 올해 1월에 펴낸 ‘아이티 지진, 그 후 5년’ 보고서를 다시 읽었다. 5년이 지났지만 운명을 바꾼 그날의 상황은 아이들에겐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를테면 벽이 머리 위로 무너질 때 함께 있던 아기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떨치지 못하는 소년 장탈은 해마다 대지진이 일어난 1월 12일만 되면 지독한 두통에 시달린다. 여전히 그 기억을 앓고 있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삶이 뒤흔들린 아이들에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행복의 모습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의 이유는 저마..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지난달 말 정부가 발표한 ‘안전혁신 마스터플랜’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규 교육과정에 안전 교육이 의무적으로 포함된다는 내용 뒤에 기사가 이렇게 이어져서다. “이에 따라 앞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에 해당 과목이 신설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깜짝 놀라 정부의 공식자료를 찾아보니 다행히 몇몇 기사가 언급한 ‘안전교육의 수학능력시험 포함 검토’ 같은 대목은 없다. 하지만 섣부른 추측보도라고 무시하기엔 찜찜하다. 시험에 넣으면 경쟁적인 주입식 교육이 되지만 시험과 무관하면 있으나마나한 과목이 되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므로, ‘중요’하고 ‘의무적’인 과목이라면 시험에 포함되리라 짐작하는 게 무리도 아닐 것이다. 과연 학교 안전교육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좋은 걸까? ..
이번 달 한겨레신문 칼럼은 시리아의 민간구조대 ‘화이트 헬멧’을 후원하자고 말하고 싶어서 썼다. 위에 링크한 동영상부터 보기를 권하고 싶다. ‘화이트 헬멧’ 대원들이 3층짜리 건물이 무너진 곳에서 생후 2주된 아기를 구해내는 장면이다. 여러 번 봤는데도 볼 때마다 울컥해진다. 지금 일하는 단체에 들어온 뒤 시리아 전쟁 중단, 한국정부의 난민 지원 확대를 촉구하는 서명운동, 광화문 촛불 캠페인 등등 해마다 시리아 내전 시작일인 3월15일이 되면 뭔가를 하면서 꼼지락거렸다. 근데 올해는 곧 나올 보고서 홍보를 제외하곤 다른 걸 하지 않을 참이다. 긴 전쟁에 지쳤다거나, 달라진 게 없어서 힘 빠졌다거나 하는 건방진 이유 때문은 아니다. 그냥 정말 모르겠다. 해결책은 뭔지, 저 먼 땅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에..
겨울에 쓰던 이불과 요를 바꾸고 이불 빨래를 하면서 봄맞이를 하던 하루. 내가 가진 가장 두툼한 이불을 빨아서 장롱 속으로 보내는 것처럼 겨울을 보내는 또 하나의 의식으로, 이 계절 내내 가장 자주 듣던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다시 들었다. 두꺼운 외투를 입기 시작하는 계절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가서 겨울을 함께 나는 곡. 봄부터 세 계절이 지나는 동안 이 곡을 잊겠지만 찬바람이 불면 이 음반을 다시 찾겠지. 이 곡을 좋아해서 여러 사람이 부른 노래를 비교해서 들어본 적도 있는데, 리히터가 피아노 연주를 맡고 페터 슈라이어가 부른 버전이 나는 가장 좋다. 디스카우가 부른 곡이 더 유명하긴 해도, 비틀거리며 방랑하는 청년의 절망을 담기엔 디스카우의 노래는 좀 강한 독일 남성의 분위기가 두드러진달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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