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독 김지운의 에세이집 '김지운의 숏컷'을 읽다.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해 '반칙왕' '장화,홍련' '달콤한 인생'등을 만들어온 김지운은 어떤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도 작품마다 자신의 인장을 선명하게 남길 줄 아는 감독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글에서도 '김지운 표'가 또렷하게 떠오른다. 긴장된 순간이 일상과 충돌해 돌연 황당해지고 어이없는 웃음을 자아내던 그의 코미디 영화들처럼, 이 책에서 그는 심각한 듯 하더니 갑자기 툭 농담을 던지고 독자가 따라 웃다보면 어느새 다시 진지해지는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또 ‘명품 호러’라고 불릴 만큼 세트 디자인이 정교하고 예쁜 ‘장화, 홍련’처럼, ‘가벼운 읽을거리’라지만 말 한마디, 표현 하나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책은 특별히 제한되지 않은 주제에 ..
지난 주 부산에 갔을 때 들렀던 인디고 서원. 전국에 하나 뿐인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이다. 부산 수영구 남천동 '학원 골목'에 자리 잡았으면서도 그 흔한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팔지 않는다. 약간 예전 대학가에 있었던 사회과학 서점의 느낌이 나기도 했고, 그보다는 훨씬 예쁘고 아늑한 공간이다. 이 서점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여기서 열린 청소년 독서세미나 내용을 모은 책 ‘주제와 변주’를 읽고서다. 무슨 10대들이 이렇게 똑똑하고 깊은지! 이곳은 베스트셀러도 남다르다. 최근 한 달간 가장 많이 팔린 책 5권은 노벨평화상을 탄 무하마드 야누스의 이야기가 실린 ‘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인’을 비롯해 ‘히말라야를 넘는 아이들’ ‘책문-시대의 물음에 답하다’ ‘철학 통조림1’ ‘즐거운 불편’이었다고 ..
나를 만든 책들은 대부분 나의 동침자들이다. 지금까지 읽은 책의 절반가량을 침대에서 혹은 바닥에서 뒹굴며 읽었다. 난 아마 전생에 땅에 붙어살던 지렁이가 아니었을까... 좋아하는 책일수록 하도 붙들고 뒹군 탓에 심하게 구겨졌고 표지가 너덜너덜하다. 과도한 스킨십과 학대의 강도를 애정의 지표로 삼았던 모양이다. ^^; 누워서 책을 읽을 때 가장 불편한 건 불끄기였다. 책을 읽다 꾸벅꾸벅 졸리기 시작하면 적당하게 불을 끄고 자야 하는데, 불을 끄러 일어나자니 잠이 깨고, 그냥 놔두자니 눈꺼풀 사이로 빛이 스며들어 잘 수가 없는 거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담...책상 위에 있던 부분조명등을 침대 옆으로 옮겨놔 봤다. 불을 끄러 일어나야 하는 애로는 일단 없다. 하지만 이 경우의 문제점은 조명 범위 안에 책..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려오면 여전히 온몸이 쭈뼛해지며 발이 들썩거린다.…제트기나 시동 걸린 엔진소리, 징 박은 말발굽 소리만 들어도…속이 뒤틀리듯 가슴이 꽉 메는 것이다.’ 마음을 들뜨게 하는 바이러스엔 약도 없다. 이 오래된 불치병에 속절없이 포로가 된 자는 몸이 근질근질한 청춘이 아니라 58세의 노작가다.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으로 유명한 존 스타인벡이 쓴 '찰리와 함께 한 여행'을 읽다. 40여년전에 한 여행이지만, 낡지 않았다. 글맛이 좋은 탁월한 산문집이다. 저자는 “미국에 관해 글을 쓰면서도 미국의 시궁창이 풍기는 진짜 냄새를 모른다면 범죄에 해당될 일”이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중병을 앓고 난 뒤였지만 “수명을 조금 더 늘이자고 장렬한 삶을 버릴 생각은 없다”며 짐짓 호..
‘더 게임’- 미국판 ‘작업의 기술’을 읽다. 이렇게 은밀한 사교(邪敎)조직 같은 모임이 실제 존재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자 유혹을 업으로 삼는 고수들이 비밀 아지트에 모여 가장 효과적인 유혹의 기술을 교류하고 남자들을 가르치는 워크숍을 연다. 비밀 기술로 무장한 ‘선수’들은 밤마다 여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작업장’인 바와 나이트클럽을 배회한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기자였고 현재 잡지 롤링스톤스의 객원 필자인 닐 스트라우스가 쓴 이 책은 내로라하는 ‘작업(Pickup)’의 고수들, 즉 ‘픽업 아티스트’들의 세계에 대한 르포르타주이자 체험기이다. 페미니스트 혹은 건전한 일부일처주의자라면 도중에 책을 내던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여자들은 늘 게임의 대상으로만 묘사되고 난잡한 성관계에 대한..
“당신은 빅토르와 함께 가야 해요. …당신은 그를 유지시켜주는 존재잖아요. 당신이 이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면 아마 후회할 거예요. 물론 오늘은 후회하지 않겠죠. …하지만 곧, 그리고 남은 인생 동안 영영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요.”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주인공 릭(험프리 보가트)이 극적으로 재회한 옛 애인 일리자(잉그리드 버그만)와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잊기 어려운 명장면이다. 일리자는 사랑하는 릭과 머물 것인지, 남편과 떠날 것인지 갈등하다 릭의 간곡한 설득으로 비행기에 오른다. 그러나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인 이 책의 저자는 일리자가 카사블랑카에 머물렀더라면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행복했을 것이며 물론 오늘은 아니었을지라도 곧, 그리고 남은 인생 동안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은..
차 없으면 꼼짝도 할 수 없는 미국을 자전거로 횡단하겠다니, 남들이 “미쳤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정도의 일이면 ‘독도 수호’ 또는 ‘불우이웃 돕기’같은 대의명분이 있을 법도 한데 웬걸, 저자는 “그냥 재미있어서”란다. 홍은택 씨가 쓴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을 읽다. 한겨레신문 ‘책 지성’ 섹션에서 가끔 읽던 연재물이었는데 책으로 묶인 걸 보니 또 다르다. 자동차 부품이 만들어지는 컨베이어 벨트를 쭉 따라가면서 보다가 드디어 ‘완제품’ 자동차를 시승하는 기분이랄까. 단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저자는 2005년 여름 80일간 자전거를 타고 미국 동쪽 끝 버지니아 주 요크타운부터 서쪽 끝 오리건 주 플로렌스까지 6400km의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달렸다고 한다. 1976년 미국 건..
“내가 제언하는 어떤 것도 믿지 말라고 여러분에게 요구한다! 단 한마디도 믿지 말기를! 이것만은 정말이지 재차 경고해야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그것이 인생의 기본적 진리라고 나는 ‘추측’한다.” 20세기의 거장으로 꼽히는 철학자가 말년에 한 강연의 서두치곤 신선하지 않은가?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나를 의심하라’니! 그것도 이렇게 강경한 어조로 말이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로 유명한 철학자 칼 포퍼(1902~1994)의 책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를 읽다. 1994년에 쓰여진 책이지만 이번에 국내에 출판됐다. 이 책은 칼 포퍼가 1980년대 중반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 썼던 수필과 강연 원고 모음집이다. 포퍼의 대표 저작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 ‘추측과 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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