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을 읽다. 소설집의 제목이 여기 실린 단편의 제목 그대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어도 좋을 것 같다. 퇴고과정에서 필수적이지 않은 모든 형용사와 부사를 솎아낸 듯 문장이 단단하고 건조하다. 최소한의 단어들만을 골라 사람들이 처한 어떤 상황을 보여준 뒤 카버는 뚝, 멈춰버린다. 주인공의 운명을 통제하는 전능한 지은이가 아니라, 그 후로 어찌 됐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어, 라고 말한 뒤 입 다물어 버리는 과묵한 남자처럼. 카버의 주인공들은 '생각'하는 대신 '행동'한다. 카버의 무심하고 간결한 말투를 따라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정말 별 것 아닌 사소한 몸짓 때문에. 표제..
니체가 눈물을 흘리다니... 정수리에 수직으로 내리꽂는 폭포같은 철학자 니체는 눈물 따위 경멸할 것만 같은데 말이죠. 심리치료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어빈 얄롬이 쓴 소설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는 실제 사건과 허구를 조합한 팩션입니다. 니체와 루 살로메 등 등장인물들이 워낙 유명한 사람들인데다 미국에선 꽤 오랜기간 베스트셀러 였던 모양입니다. 올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더군요. 위의 사진은 책 표지가 아니라 영화 포스터입니다. imdb 별점이 4개 (10개 만점)인 것을 보면, 영화는 꽝인 모양입니다. -.-; 니체 역할을 맡은 배우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당최 모르겠는데) 아먼드 아상테 Armand Assante (오른쪽)는 분장을 하면 그럭저럭 니체를 닮을 것 같죠? 하지만 루 살로메를 연기한 배우 캐..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자기계발서가 1,2위를 차지하는 것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요즘도 '시크릿'과 '이기는 습관'이 번갈아 1위에 오르내리고 있더군요. 자기계발서들이 얄팍하다는 비난을 많이 듣지만, 전 (아닌 척 하면서도) 자기계발서들을 많이 읽는 편입니다. ^^; 대개는 읽을 때 '맞아, 맞아' 하면서도 책을 덮고 나면 방금 읽은 내용이 싸악 휘발돼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참 뻔한 소리들인데 왜 읽을까 후회하기 시작하는 것도 그때부터죠. ^^; 서점을 어슬렁거리다 발견한 ‘역설의 심리학’ 은 뻔한 자기계발서들을 호되게 비판하는 심리학자의 책입니다. 저자가 말기암을 극복하면서 겪은 일들을 바탕 삼아 자기계발서들의 주요 레퍼토리들-자아존중감을 가질 것, 희망을 잃지 말 것, 긍정적으로 살 것..
오래된 숲에 가본 적이 있으신지요. 적막함이 뒤덮은 숲 속이지만 뭔가 미세한 움직임의 기운이 늘 귓전과 뒤통수를 간질이지 않던가요. 저 굵은 나무 뒤편 어디에선가 날 지켜보는 다른 생명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때론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하지요. 산림학자 차윤정이 쓴 ‘나무의 죽음’을 읽다보면 오래된 숲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이 미세한 기운이 실은 평온함 속에서 격렬하게 움직이는 생명의 역동을 증거하는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오래된 숲의 나무를 주인공 삼아 새로운 종의 탄생과 소멸이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다뤘습니다. 얼마 전 이 책을 읽은 뒤 강원도 횡성의 산자락에 올랐는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무, 그 위에 피어난 이끼, 나무 밑동의 버섯들이 예사롭지 않게 눈에 들어오더군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자는 것’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나면 메아리처럼 머릿속에서 울려오는 구절이다. 이 말은 책 속에서 비슷한 말들로 여러 번 변주된다.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 ‘버티면 버티어지는 것이고 버티지 않으면 버티어지지 못하는 것’, ‘삶의 자리는 성 밖에 있는데 버티어야 할 것이 모두 소멸될 때까지 버티어야 하는 것인지’…. 비슷한 말들이 침략국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관료의 입에서도, 얼어 죽는 군병을 살려야 할 때 종친의 옷이나 챙기는 관료의 입에서도, 침략국의 앞잡이가 되어 항복을 강요하는 통역관의 입에서도 흘러나온다. ‘당면한 일’을 어떻게 당면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 말들이 난무할 뿐 등장인물들의 성격적 차이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입과 속말을..
"하나의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시민들은 예전처럼 헤엄을 쳐서 건너든가 아니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된다. 다리는 사회 전체에 절대로 데우스엑스마키나 식으로 만들어져서는 안된다. 그런 방식이 아니라 시민들의 피와 땀, 두뇌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 -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에서 재인용 - 데우스엑스마키나 (Deus ex machina) = 소설과 희곡 영화 등 모든 서사의 종결부에서 갑작스레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인위적이며 부자연스러우며 안이한 방식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 고전극에서 자주 활용되던 극작술에서 유래한 말이다. 주인공이 궁지에 빠..
문: 세상에서 가장 싫은 물고기는? 답: 아이디어(魚) …썰렁하다. ^^; 기획회의를 앞두고 바닥난 곳간처럼 텅 빈 머릿속이 원망스러울 때 동료들과 이런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킬킬거렸던 적이 있다. 콘텐트 생산자 뿐 아니라 학자, 예술가, 기업의 CEO, 자영업자, 평범한 회사원에 이르기까지, 이 물고기를 잡으려는 낚시질은 생업의 가장 긴급한 문제가 아닐까. 미끄덩 빠져나가기 일쑤고 대어라고 낚아놨더니 알고 보면 잡어인데다 옆집과 똑같이 생긴 건 낚아봤자 팔아먹을 수도 없는 이 물고기를 낚는 데에도 분명 요령이 있으렷다. ‘생각의 탄생’을 쓴 저자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로 초점을 옮기라고 권고한다. 같은 주제이더라도 다루는 방식,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것을 발견해낼 ..
내가 기록해둔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중 하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는 것이다. 프랑스 생장피드보르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800km의 길. 예수의 열두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걸었던 길. 언제부터 그 길을 마음에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일상을 떠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길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내 모습을 몽상했다. 그러다.... 시들해졌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을 통해 이 길이 점점 유명해졌고, 급기야 3년 전쯤인가 ‘겁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여행가 김남희씨가 오마이뉴스에 쓴 산티아고 순례기 연재를 보고, 에라, 안되겠다, 마음을 접었다. …좀 이상한 일이다. 깃발 꽂으러 가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나 가는 길이면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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