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 마음 대청소. 저녁에 책장과 너저분하게 널린 글 쪼가리들 정리하던 중 2월 코펜하겐 출장 다녀온 뒤 끼적이다 만 메모를 발견. 서울에 돌아오기 전 반나절 여유 시간 동안 머물렀던 해방 구역 크리스티아니아에 대한 메모다. 아이폰을 뒤져보니 사진도 몇 장 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살아보고 싶은 곳. 잊기 전에 추억 삼아 올려놓는다. ---------------------------------- 코펜하겐 안의 해방 구역, 크리스티아니아는 입구부터 범상치 않았다. ‘크리스티아니아’ 입구를 들어선 뒤 돌아보니 반대쪽엔 ‘당신은 지금 EU로 나가고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우린 EU 밖의 자유구역’이라고 선포하는 셈이다. 마을 안 담벼락엔 누군가가 "International"에 반대되는 의미로 “O..
이 시인, 딱 이 느낌으로 '봄이라고 하자'도 하나 써주었으면 좋겠다. 며칠전에 핀 목련이 벌써 꽃잎을 흩뿌리며 수런대는 봄밤. 다 사라지기 전에. ------------------------------------ 가을이라고 하자/ 민구 지음 그는 성벽을 뛰어넘어 공주의 복사꽃 치마를 벗긴 전공으로 계곡타임즈 1면에 대서특필됐다 도화국 왕은 그녀를 밖으로 내쫓고 문을 내걸었다 지나가던 삼신할미가 밭에 고추를 매달아놓으니 저 복숭아는 그럼 누구의 아이냐? 옥수수들이 수군대는 거였다 어제는 감나무 은행이 털렸다 목격자인 도랑의 증언에 의하면 어제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원래, 기억이란 게 하루 사이에 흘러가기도 하는 거 아니냐며, 조사 나온 잠자리에게 도리어 씩씩 대는 거였다 룸살롱의 장미가 봤다고 하고 꼿꼿하..
3월31일자 내일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바로가기) 슬럼가 주민들에게 손씻기를 가르치는 인도 여성들 인도네시아 여성 아데의 하루는 아침 6시에 시작된다. 임신한 여성이 있거나 어린 아이가 있는 집마다 들러 임산부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신생아들의 몸무게를 달고 예방접종을 하며 간단한 질병을 치료한다. 오토바이택시를 타고 오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매주 20~30곳의 집을 방문한다. 자신이 만삭일 때에도 한 달에 417명의 아이 몸무게를 재고 23명의 아이 예방접종을 하고 33명의 임신한 여성을 돌보았다. 5천여 명이 사는 마을에서 여성들이 출산을 하거나 아이가 아프면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그다. 아데는 의사도, 간호사도 아니다. 15년째 이 일을 해왔지만 그저 마을의 평범한 주부일 뿐이다. 최근 내가..
지난 일요일 MBC FM ‘이동진의 문화야 놀자’ 라디오 방송에서 진행자인 이동진 씨가 제 책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의 한 구절을 읽어주었습니다. 제가 책에 쓴 구절보다 그가 덧붙인 해설이 좋네요. 그가 읽은 대목과 코멘트를 아래 올립니다. 그가 고른 구절에 언급된 '몰리나세카 가는 길'은 아래 사진에 나오는 길입니다. 아~이 사진을 보니 다시 가고 싶어지는군요....이제 '봄'이라 불러도 좋을 3월입니다. 다시 혼자 걷기 시작했다. 이날 몰리나세카까지 가는 길은 카미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웠다. 가파른 산길이지만 굴곡이 큰 산등성이마다 갖가지 색으로 피어난 꽃들 덕분에 저절로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높은 산에 오를 때마다 나는 정복의 쾌감 대신 스스로가 한없이 왜소하게 느껴지는..
오늘 아침자 한겨레 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바로 가기) 신문에 실린 것보다 살짝 긴 원문입니다. * * * 얼마 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아프리카 A국출신 여성 B씨가 아이를 낳았다. 낯선 곳에서 살아갈 결심을 한 난민 신청자이지만 아이는 언젠가 고국에 보내고 싶은 마음에 B씨는 아이의 국적 취득 절차를 밟기로 했다. 한국엔 A국 대사관이 없어서 가까운 나라 주재 대사관에 연락해야 한다. 여기까지, 뭐 별 일 아닌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정부의 박해를 피해 탈출한 난민 신청자가 본국 대사관에 연락해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난민은 정치적 견해, 종교나 인종 또는 특수한 집단적 정체성으로 인해 가해지는 억압과 박해를 피해 자신의 국가에서 탈출한 사람들이다. 탄압의 주체가 정..
“나는 행복하다. [ ]가 있으니까”를 쓰는 이 릴레이, 구월산님께 넘겨받은지도 한참인데 마감시간 30여분 남겨놓고 이제사 부랴부랴 씁니다. 이 초치기 버릇을 어찌할꼬.... 굳이 이유를 대자면, 변명이긴 하지만 두 건의 출장을 앞두고 정말 심하게 바쁩니다. 지금도 밤을 꼬박 새워야 할 처지. ㅠ.ㅠ 더군다나 뭐라 대답할지도 난감한 질문이구요. 한참 전, 다른 사람의 블로그에서 이 릴레이를 봤을 때, 무심코 혼자 이렇게 중얼거린 적이 있어요. ‘나는 행복하다. 행복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까.’ 블로그가 워낙 썰렁해 릴레이 바통이 제게 오리라 생각도 못했는데, 숙제를 받아 안고 나니 이런 제 생각이 이전 주자인 구월산님의 답과 비슷하네요. 이런....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난기 ..
한겨레 오피니언 사이트 [훅]에 쓴 글입니다. (훅 바로가기) -------------------------------------------------------------------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은 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 나는 아이들이 자신이 분류되는 방식에 얼마나 민감한지 절감하곤 한다. 예컨대 ‘다문화’를 생각해보자. 공식적인 법률 명칭도 ‘다문화가족지원법’인데다 지방자치단체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고 기업이 지원하는 ‘다문화’ 행사가 넘쳐난다. 이렇게 보편화하였으니 가치중립적 용어가 된 걸까? 내가 일하는 단체의 권리 교육에 참여했던 열한 살 난 ‘다문화’ 여자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학교에서 선생님이 다문화 가정 손들라고 맨날 그러잖아요. 그럼 손을 드는데 저밖에..
며칠 전 트위터에서 RT를 타고 낯선 이의 요청이 들어왔다. “RT 부탁 드립니다. 제 동생은 7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서 20년을 뇌성마비로 지냈습니다. 가족 말고는 친구 한 명 못 사귀고 떠났습니다. 이제 가는 동생에게 잘 가라는 인사 부탁 드립니다. 제 동생 이름은 서수억입니다.” 처음 그 글을 봤을 땐 당황스러워 지나쳤는데, 계속 마음에 걸렸다. 친구 한 명 없던 동생의 가는 길이 얼마나 안쓰러웠으면 이렇게 낯선 이들에게 한 번만 동생 이름을 불러달라고 청할까. 타임라인을 한참 되돌아가 그 글을 찾아내 RT를 했다. 그러고 난 뒤 잊고 있었는데, 오늘 자기 직전 잠깐 스마트폰으로 트위터를 열었다가 그 분의 멘션을 보고기어이 다시 일어나고야 말았다. RT를 했던 사람들에게 서수억 씨의 엄마는 일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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